딸의 그림을 보고서야 알았다 “인지와 사고는 다르다는 것을”

입력 2025-09-14 07:00
김나경양의 '기억의 시간'(목소리의 숲에서 낭독하는 성우3). 밀알복지재단 제공

한 소녀의 마음 속, 짙푸른 세상에서 오렌지색 꽃 한 송이가 불꽃처럼 타오른다(‘뜨거운 꽃’). 그 열정의 옆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운 채 침묵하는 거대한 매가 자리 잡고 있다(‘내 마음속 고요한 매’). 이 세계의 주인은 때로 골목을 지키는 고양이의 가면을 쓰고(‘골목대장 고양이’), 잊지 못할 목소리들은 수많은 캐릭터가 되어 기억의 숲을 이룬다(‘기억의 시간’). 이 강렬하고도 고요한 내면의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온 이는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작가 김나경(14)양이다. 말로 하는 표현은 서툴지만, 그림은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찾은 가장 솔직한 언어다.

김나경양의 '뜨거운 꽃'.

11일 국민일보가 찾아간 서울 중구 ‘모두미술공간’의 ‘기억의 시작은 그림이었다’ 전시장은 26명 작가들의 개성이 담긴 다채로운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밀알복지재단이 지난 2014년부터 미술에 재능 있는 발달장애 청소년들을 지원해온 ‘봄(Seeing&Spring) 프로젝트’가 맺는 11번째 결실이다. 프로젝트에 선발된 작가들은 10개월간 전문 미술 교육을 지원받으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왔다. 청소년 작가들의 ‘기억의 첫 장’에서 시작해 꾸준한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기억의 지속’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보여준다.

왼쪽부터 김나경양의 '로즈마리가 있는 카페' '내 마음속 고요한 매' '기억의 시간(목소리의 숲에서 낭독하는 성우3)'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 뒤에는 발달장애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묵묵히 함께 걸어온 가족들이 있었다. 김나경양의 어머니 박모씨는 또래보다 말이 2년 늦었던 딸의 손을 잡고 치료실을 다녔다. 아이들이 말장난으로 어울릴 때, 나경 양은 그 무리에 선뜻 끼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아이들 곁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나경양이 세상과 함께하는 방식이었고 스스로를 단단하게 하는 통로였다.


박씨는 “그림이 소재가 돼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며 “다른 분야에선 긍정적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어서 주눅들던 아이가 그림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고 행복해졌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가 만나본 발달장애 친구들은 인지력은 조금 떨어져도 사고력이 부족하지 않다는걸 알았다”며 “인지능력이 부족한 모습들만 주목받고 주눅들어 사고를 표현할 기회를 부족했던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함정윤군의 '비밀정원의 군주'

지난 9일 전시 오프닝에 참여한 청소년 작가들은 직접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함정윤(10)군은 “제 그림 속 공룡, 선인장, 동물들은 제가 만든 특별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경양은 자신의 작품들을 가리키며 “제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기억들을 담고 있는 그림들”이라고 소개했다.

손우진군의 '세계'

전시장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는 26개의 세계가 펼쳐진다. 개그맨 작가를 꿈꾸는 임지호(16)군의 캔버스는 사춘기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수많은 캐릭터로 가득하고, 최재용(16)군는 친구와 함께한 미술 시간이라는 따뜻한 기억을 파란 코끼리가 등장하는 환상적인 숲 속 풍경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런가 하면 양예준(15)군는 기억 속 인물의 얼굴을 큐비즘 기법으로 재해석하며 내면의 감정을 기록한다. 26명 작가들의 꾸준한 창작과 변화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는 18일까지 계속된다.

서울 중구 모두미술공간에서 열린 밀알복지재단 ‘기억의 시작은 그림이었다’ 전시회 모습

글·사진=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