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공연계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여성 서사의 증가다. 과거에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 주인공의 연인 등 조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계속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2018년 한국에서도 터져 나온 미투(me too) 운동의 영향으로 창작자들과 제작자들이 적극적으로 여성 서사를 다루게 된 것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국내 공연계 관객의 80%를 차지하는 여성 관객들 역시 젠더 이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여성 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됐다.
올가을에도 여성 서사를 다루는 작품이 적지 않게 관객과 만난다. 앞서 여성 주인공의 성장과 여성들의 연대를 다뤄 호평받은 뮤지컬 ‘마리 퀴리’ ‘레드북’과 연극 ‘기도문’ 등이 다시 무대에 오르는 가운데 여성의 몸과 주체성을 다룬 신작 연극 두 편도 나란히 개막했다.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 중인 ‘프리마 파시’(~11월 2일)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 중인 ‘마른 여자들’(~28일까지)이다.
‘프리마 파시’는 승승장구하던 여성 변호사 테사가 데이트 강간을 당한 뒤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1인극이다. 제목인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법률 용어로, 강력한 반증이 제기되기 전까지 기존 사실이나 주장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사는 성폭행 혐의를 받는 남성 의뢰인을 변호할 때 증인 진술의 허점을 찾아내 무죄를 끌어내곤 했다. 하지만 호감이 있던 동료 변호사 줄리언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법의 맹점을 깨닫게 된다. 데이트에서 만취한 테사는 줄리언에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후 무력감과 공포감에 빠진다. 이후 테사는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존엄을 위해 성폭행 소송을 제기한다. 법적 다툼과 재판의 승패보다는 길고 힘든 싸움을 선택한 인물의 심리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인권 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가 쓴 ‘프리마 파시’는 2019년 호주에서 초연된 이후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뒤흔들며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가 감내해야 하는 가혹한 입증 책임과 법 체제의 허점을 날카롭게 포착하며 깊은 울림을 안긴다. 2023년 토니상 여우주연상, 같은 해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연극상과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신유청이 연출을 맡은 한국 공연은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등 스타 여배우 세 명이 번갈아 가며 출연한다.
‘마른 여자들’은 뉴질랜드 작가 다이애나 클라크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섭식장애를 가진 쌍둥이 자매 로즈와 릴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쌍둥이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교생활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한다. 하지만 로즈는 점점 다이어트에 빠진 끝에 거식증에 걸려 시설에 들어가고, 폭식증을 앓는 릴리는 데이트폭력에 노출돼 있다. 시설에 수용된 여자들은 살이 찔까 두려워하며 음식을 버리거나 구토하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릴리를 생각하며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로즈를 비롯해 ‘마른 여자들’은 자신의 몸과 반목하는 데서 벗어나려 애쓴다.
최근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날씬한 몸에 대한 강박이 심하다. 특히 여성의 몸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받고 소비된다. 이 때문에 극단적으로 마른 몸을 선망하며 일부러 섭식장애를 가지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거식증이나 폭식증이나 방향이 다를 뿐 둘 다 자기 학대다.
올해 ‘두산아트센터 아티스트’로 선정된 극작가 겸 연출가 박주영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여성의 몸에 대한 욕망과 혐오의 시선,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에 주목했다. 2018년 극단 기지를 창단한 박주영은 혜화동 1번지 8기 동인 출신으로 지난 2023년 여성 배 수리공을 소재로 한 ‘고쳐서 나가는 곳’으로 제60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가상을 받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대하며 방향성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서사를 역동적으로 보여줬다”는 당시 평가는 이번 ‘마른 여자들’에도 적용된다. 박주영은 이번 작업 과정에서 언어가 주는 이미지가 실제 배우들의 신체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위험을 고려해 “절대 마르지 마시오”라는 원칙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