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와 성과에 집착하는 ‘나’는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 19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착취당했는가. 이런 질문들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화 ‘얼굴’로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현지에 머물고 있는 연상호 감독은 10일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화상으로 진행된 간담회에서 작품 구상 계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얼굴’은 연 감독 자신이 2018년 쓰고 그린 동명의 첫 그래픽 노블을 직접 영화화한 작품이다.
국내에서 11일 개봉하는 ‘얼굴’은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살면서 남에게 천대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 온 임영규(권해효)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 만에 백골 사체로 돌아온 아내이자 어머니 정영희(신현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키워드는 ‘아름다움’이다.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도장을 만드는 영규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는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운 건 존경받고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한다”는 게 그의 확고부동한 생각이다.
평생 모멸감 속에 살아온 영규는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번듯하게 사는 게 꿈”이다. 그런 그가 영희와 결혼한 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영희는 불의에 맞서는 용감하고 멋진 여성이지만, 외모 때문에 매번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영희를 본 이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못생겼어.” “괴물 같아.”
40여 년의 시간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의 중심에 배우 박정민이 있다. 그는 아들 동환과 젊은 시절 영규 역을 동시에 맡아 극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간다. 그의 1인 2역은 동환과 영규 부자가 서로 똑 닮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다. 생애 처음 1인 2역을 소화한 박정민은 “주제와 맞닿은 선택이기에 더 가열하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도전이라는 느낌보다는 두 역할이 제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작품 합류 이유에 대해 박정민은 “원작에 대한 호감이 큰 한 명의 독자였다. 이걸 감독님이 영화로 만든다고 하셨을 때 작가의 메시지를 묵직하게 전달하는 영화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며 “연 감독님이 사회에 투덜대는 영화를 만드실 때가 좋다. 기꺼이 참여하고 싶었다”고 했다. 나이 든 영규 역의 권해효는 “연 감독과의 첫 작품이 ‘사이비’(2013)였는데 이번 작업에 들어가기 전 그때 느낌이 나더라”며 “이런 제작 방식 자체가 감독이자 작가로서 연상호의 가장 좋은 점을 맘껏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얘기했다.
각자 시각장애가 있는 가족을 뒀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은 시각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박정민은 “준비 과정부터 촬영 때까지도 저희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이 작품이 제게는 일종의 선물이 됐다”고 고백했다. 권해효는 “15년 넘게 시각장애인인 장인어른과 살면서 그분의 일상을 봐왔기 때문에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며 “단지 태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시각예술을 한다는 설정을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부분을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얼굴’은 놀랍게도 제작비 2억원으로 만든 초저예산 영화다. 연 감독은 “사실 처음 저예산으로 제작하겠단 결심을 했을 땐 1억원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도 했다. 물정을 몰랐던 거다. ‘그렇게 만들어 (완성본이) 후지게 나오면 면이 안 서는데’라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면이 안 설까 봐 못하면 면만 세우는 사람이 될 거 같아 후지더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적은 예산으로도 여느 상업영화 못지않게 훌륭한 결과물을 완성해 낸 그는 “전설적인 아시아 영화들을 보면서 영감을 많이 받았는데 대부분이 저예산 영화였다. 저예산 영화가 주는 힘이 따로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면서 “요새는 이걸 어떻게 하면 시스템화할 수 있을까 하는 욕심이 든다. 이런 형태의 작업, 다시 말해 지금까지 영화를 만든 기준과는 다른 영화가 계속 나오도록 시스템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깊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행’(2016) ‘반도’(2020) 등 전작에서 남 부럽지 않은 흥행을 맛본 연 감독이지만 “이번 작품보다 흥행에 목마른 작품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적은 예산으로 고생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보상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민이 합류하고, 전작에서 함께한 스태프들도 모이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다”며 “현장에서 이들을 너무 고생시켜 미안하다. 흥행으로 보상해주고 싶다.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