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대법관 늘리자면서 4심제 가자는 건 모순”

입력 2025-09-10 21:58 수정 2025-09-10 22:19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0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이냐시오관 강당에서 ‘법률가의 길: 헌법소원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다. 뉴시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10일 “사법개혁 필요성에 동의하지만 헌법이 사법부에 부여한 권한을 존중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개혁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정치권에서 여당 주도로 추진 중인 사법개혁에 대해 신중론을 제기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이날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이냐시오관 강당에서 ‘법률가의 길: 헌법소원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열고 “권력을 세 갈래로 쪼갠 뒤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자는 게 대부분 민주국가에서 오랜 숙고 끝에 확립한 제도”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 강연에서는 서강대 멘토링센터장을 맡고 있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대검찰청 감찰부장 출신 한동수 변호사가 함께 대담했다.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 도입 등 여당 중심의 사법개혁 방안에 대해 문 전 권한대행은 “신중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사법개혁의 지향점은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돼야 하며, 대법관 증원은 이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라며 “한국 대법원이 법률심에 그치지 않고 사실인정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문 전 권한대행은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사합의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판사를 만났는데, 일주일에 4일을 재판하고 판결문을 쓰는 데는 하루밖에 없다고 하더라”며 “심리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문제도 논의 안건에 넣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2심 법원에서 느꼈던 것이 대법원까지 갈 필요가 없는 사건의 상고가 과도하게 많다는 것인데, 이 문제도 적당한 선에서 걸러낼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상고심 제도를 사실심의 연장을 볼 것인지, 법률심으로 유지할 건지에 대한 큰 틀을 먼저 정하고, 상고가 잦은 이유를 분석한 뒤 이를 해소하려는 방안을 논의하는 순서로 가야 한다”며 “이를 모두 생략한 채, 국회와 대법원 간에 이 주제를 두고 한 차례도 대화하지 않고 대법관 증원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면 오는 12일과 25일 각각 열릴 예정인 전국법원장회의와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좋은 의견을 수렴해 국회와 정부 등에서 추가로 충분히 논의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사법부에서 우려하고 있는 재판 독립 침해 가능성과 관련해 문 전 권한대행은 “사법 독립은 사법부가 존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법부는 사법 독립을 방패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해서도 안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사법부는 더더욱 존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결정에 불복해 헌재에 국민이 소원하는 제도인 재판소원 도입에 대해선 “반드시 4심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법원에 한 해 동안 접수되는 사건이 4만 건이 넘는다. 이 사건 판결에 대해 30% 이상이 불복할 것이고, 일 년에 이미 1만2000건가량의 사건이 접수되는 헌재에서 결정이 나오기까지는 3~4년이 추가로 소요된다”며 권리 구제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이어 “재판소원이 활발한 독일에서도 인용률은 1~2%에 그친다”며 “신속한 재판을 위해 대법관을 늘리자면서 (사실상) 4심제로 가자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판소원의 대안으로는 헌재가 내린 한정위헌결정(조문 전체가 아닌 해석 방식에 대한 위헌 여부 판단)을 재심 사유로 인정하는 쪽으로 법안을 개정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발의한 헌재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으로, 문 전 권한대행은 “윤 의원 발의 법안대로 하는 게 어떤가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재임 당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심판을 이어가기 위해 심판정족수를 규정한 헌재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한 결정을 언급하며 “그 결정이 없었다면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도 불가능했고,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혁은 그렇게 하는 것이며 개혁이란 당장 당면하지 않은 미래의 문제를 생각하며 다각도의 연구를 거쳐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선고를 전원일치로 끌어낸 요인에 대해선 “처음부터 재판관 전원일치로 파면을 선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치를 없애고 군인을 동원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비상계엄령은 ‘관용과 자제’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 것이었고,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은 헌법재판관들도 용납할 수 없어야 했다”고 돌이켰다.

탄핵 결정문과 관련해선 “계엄 사태의 피해자인 국민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써야 한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재판관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며 “6년 재임 기간 그보다 더 공들여 쓴 결정문은 없었다”고 말했다. 문 전 권한대행은 “‘정부와 국회 간 대립은 일방의 책임이 아니며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조율되고 해소돼야 할 정치 문제’라는 내용의 문장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면서 “정치 문제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야지, 계엄을 동원할 것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 있어야 파면의 논리가 완성되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라는 단어가 특정 정당을 연상케 한다는 의견이 있어 ‘또한’으로 바꾼 일화를 소개하면서 “‘단어’를 토론해 결정문에 넣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검찰청 폐지 위헌 논란에 대해선 “위헌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문일답 시간에 한 학생이 정계 진출 가능성을 묻자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헌법에 담고 싶은 추가적인 기본권을 묻는 말에는 “모든 국민은 적절한 주거에 살 권리가 있다”며 “집은 투기나 투자 수단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어려움이나 내일의 꿈을 이야기하는 기본권이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라고 답했다.

김혜원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