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낙인… 61년 만에 바로잡힌 정의

입력 2025-09-10 14:44 수정 2025-09-10 14:59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씨가 10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꽃다발을 받고 있다. 최씨는 61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

1964년, 18세 소녀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 법원은 이를 ‘중상해’라며 유죄를 선고했고, 소녀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낙인찍혔다.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지금, 법원은 늦게나마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산지법 형사5부(재판장 김현순)는 10일 중상해 혐의로 기소된 최말자(79·여)씨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불구에 이르렀다는 점은 증명되지 않았고, 피고인의 행위는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당시 최 씨는 귀가하던 길에 처음 본 남성에게 어깨를 붙잡히고 넘어져 반복적으로 강제적 입맞춤을 당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코가 막혀 호흡이 곤란한 상황에서 남성이 혀를 밀어 넣었고, 최 씨는 본능적으로 이를 깨물었다. 법원은 이 행위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어였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혀 봉합 수술을 받은 뒤 군에 입대해 1급 판정을 받고 운전병으로 복무했으며, 베트남전에 파병돼 만기 제대한 점에 주목했다. 지인 진술에서도 사건 1년 뒤에는 정상 대화가 가능했다고 확인됐다. 이에 따라 “당시 판결에서 인정한 ‘영구적 불구’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인적이 드문 들판에서 체격이 큰 성인 남성에게 반복적이고 물리적인 공격을 받았다”며 “입속으로 들어온 혀를 깨무는 행위는 즉각적이고 유효한 방어 수단이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중상해뿐 아니라 축소 사실인 상해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이번 재심은 사건 발생 56년 만인 2020년 제기된 청구에서 시작됐다. 1·2심은 기각했지만, 대법원이 “불법 구금과 강압 수사 정황이 충분하다”며 파기환송 했고, 부산고법이 올해 2월 항고를 인용해 재심이 개시됐다. 검찰도 지난 7월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행위로 위법성이 없다”며 무죄를 구형했고, 이날 법원은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로 최 씨는 6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상해가 불구에 해당하지 않고, 피고인의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법학 교재와 판례집에서 정당방위 한계를 설명하는 사례로 인용돼 왔으며, 이번 재심 판결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게 됐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