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한 은행에서 인공지능(AI) 챗봇 훈련 업무를 담당한 여성이 회사의 인원 감축으로 해고되는 일이 발생했다. 근로자를 대체할 챗봇을 근로자 본인이 직접 훈련해 온 셈이다. 거센 논란에 직면한 해당 은행은 결국 해고된 직원들의 복직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호주 내에서는 AI 시대에 노동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7일 호주 파이낸셜 리뷰(AFR)에 따르면 호주에 본사를 둔 커먼웰스은행(CBA)은 지난 7월 고객 콜센터 직원 45명을 해고했다. 새로 도입한 챗봇 시스템이 고객 응대 업무의 상당량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력 감축을 결정한 것이다.
CBA에서 25년간 근무한 캐서린 설리번도 해고의 위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지난 5년 동안 ‘고객 메시징 팀’에서 근무한 그는 7월 28일을 끝으로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캐서린이 CBA에서 마지막으로 담당한 업무는 챗봇 ‘범블비(Bumblebee)’의 답변 대본을 만들고, 이를 테스트하는 일이었다. 실제 고객 응대 시험 단계에서 범블비가 대본대로 답변하지 못할 경우에는 캐서린이 직접 대응하기도 했다.
캐서린은 범블비가 고객 응대에 투입되면 자신은 다른 부서로 재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해고 통보였다. 캐서린은 “25년간 근무한 뒤 (챗봇으로 인해) 해고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결국 내 일을 빼앗은 챗봇을 내가 훈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캐서린은 사측의 해고 결정 과정도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해고와 관련된 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불과 1시간 전에 통보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8일이 지나도록 사측은 캐서린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CBA는 챗봇이 매주 2000건의 고객 전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됐으며, 이에 따라 45개 직무가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호주 금융노동조합(FSU)이 공정근로위원회에 제소하고, 호주 내에서도 논란이 거세지면서 결국 해고 결정을 번복했다. 그러면서 “AI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경영상 모든 고려사항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CBA는 해고된 직원들에게 기존 업무 복귀, 다른 부서 전환, 희망퇴직 등 3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은 호주 내에서 AI로 인한 첫 공식 해고 사례로 기록됐다. FSU는 기업이 AI를 도입할 때 사전에 반드시 협의하고, 대체되는 노동자를 재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호주 정부는 올해 연말에 발표 예정인 ‘AI 국가 역량 계획’에 이와 관련된 조항을 포함할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CBA는 AI를 명목으로 사실상 취약 계층 직원을 해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병가나 간병 휴가 사용이 잦은 직원들이 해고 대상에 다수 포함됐다는 의혹이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