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이집트 다합으로 향하는 길. 출발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스라엘 국경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여권 검사는 여섯 차례를 넘겼다. 차량이나 소지품 검문까지 합치면 열 번에 가까운 검사를 거쳐야 했다. 검문소마다 무장 군인들이 서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낯선 이를 거르려는 듯 예리했다. ‘이 길은 지난 6월 전쟁 당시 교민들이 목숨을 건 피난길로 삼았던 바로 그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창밖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와 돌, 황폐한 대지가 펼쳐졌다.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도 긴장은 짙어졌다. 언제 또 검문소에 걸려 세워질지 몰라 눈길은 창밖과 군인의 표정 사이를 오갔다. 8시간 가까운 여정 동안 사막은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계속 요동쳤다.
그 길 위에서 지난 6월의 이야기가 겹쳐 떠올랐다. 당시 이스라엘 거주하는 한인들은 전쟁의 불길을 피해 요르단과 이집트로 몸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한인회(회장 이강근 목사)가 피난길을 열었고 교민들은 서로의 집을 내어주며 피난처가 됐다. 대사관이 난색을 보이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도 교민 사회였다. 결국 정부도 뒤따라 40여명에 달하는 피란 계획이 실행됐다.
기자가 건넌 길은 더 이상 피란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똑같은 검문소, 똑같은 사막을 지나면서 교민들이 그때 느꼈을 두려움과 고단함이 실감이 났다. 서로의 집을 내어주는 연대가 없었다면 교민들은 버틸 수 있었을까 의문부호가 따라붙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마다 그 연대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 경험은 교민 사회를 변화시켰다. 레반트 지역(이스라엘·레바논·시리아·요르단·이집트)에 흩어져 있던 한인회장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레반트 지역 한인총연합회’를 출범하기로 했다. 전쟁과 테러가 잦은 땅에서 교민 안전을 지키려면 각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현지시간) 이집트 다합에서 열린 출범식에는 박재원 이집트한인회장, 이경수 이집트한인회 부회장, 이강근 이스라엘한인회장, 황성훈 이스라엘한인회 부회장, 이충환 레바논한인회장, 장영수 레바논한인회 부회장이 참석했다. 장한주 요르단한인회장은 중동정세 악화로 불참했다.
초대 총연합회장은 이강근 이스라엘한인회장이 맡는다. 이 목사는 “이곳에 산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을 위한 최전선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스라엘에는 800여 교민이 살고 있지만 대사관 직원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상주하는 교민들이야말로 조국을 위한 최전선에 있다. 대사관은 2~3년 근무하다 떠나지만 교민은 평생을 산다. 레반트 한인총연합회는 처음으로 전쟁 상황에서 이웃 한인회가 공조 체제를 이룬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충환 레바논한인회장은 시리아 교민 출신으로 15시간을 거쳐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레바논은 인접국으로 나갈 길이 없다. 시리아는 여행금지국가라 통과 자체가 불가능하다.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적대국이라 고립돼 있다”며 “각 나라가 아이디어를 모아 함께 안전 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재원 이집트한인회장은 “지난해 1월 이집트한인회장을 맡았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면서 “그런데 다른 이웃 국가 교민들을 만나면서 연계망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집트는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지만 교민사회마다 어려움이 있다. 여유 있는 곳이 어려운 지역을 도울 수 있다면 보람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6월 전쟁 당시 교민 피란을 돕던 기억도 공유됐다. 황성훈 이스라엘한인회 부회장은 “레반트 지역 교민들이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아왔다”며 “팀을 꾸려 새벽 4시에 간식과 물자를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회의에서는 향후 운영 방향도 논의됐다. 이강근 회장은 “사단법인이나 NGO로 본격화해 전·현직 회장들이 함께하는 멤버십 구조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종교색은 배제하되 선교사 출신이 다수인 교민사회의 특성을 반영해 운영하기로 했다.
자리에서는 ‘안전 공조’와 ‘선교적 연대’라는 두 축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평화 시에는 문화와 예술 교류를, 위기 시에는 공동 철수 계획과 안전 대책을 마련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교민의 절반 이상이 선교사, 90% 가까이가 기독교인인 만큼 성경의 땅에서 함께 기도하며 지역을 섬기자는 뜻도 이어졌다.
예루살렘·다합=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