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피해 무과실 배상 책임제’를 꺼내든 금융 당국에 은행권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올해 1조원을 가뿐히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배상 기준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예상치 못한 지출이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은 금융 당국의 입법 움직임을 주시하는 한편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책을 마련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은행을 비롯해 회원사 23곳의 팀장급 실무자는 이날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 모여 보이스피싱 무과실 배상 책임제 입법 대응책을 논의했다. 금융 당국에서 배상 기준 등 구체안을 아직 내놓지 않은 만큼 은행별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책과 자율 배상 상황 등을 공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체안이 나오면 배상 기준 등을 살펴 대응 방안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관계 부처 합동으로 보이스피싱 근절 대책을 내놨는데,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을 개정해 은행에 과실이 없는 경우에도 피해액 일부를 배상하도록 법제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이스피싱 수법이 정교해져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금융 당국은 대책 마련 과정에서 은행권 의견은 수렴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8000억원에 육박한다. 이 추세라면 연간 피해액은 1조4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의 배상 비율이 10%로 정해진다고 가정하면 1400억원가량을 배상해야 한다. 은행권은 현재 과실이 있는 경우에 한해 피해액 일부를 자율 배상하고 있다. 2024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자율 배상한 금액은 1억2000만원 수준이다.
은행권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최근 보이스피싱 피해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은행권이 아니라 지역 NH농협·MG새마을금고 등 제2 금융권에서 주로 일어나는데 억울하다”면서 “과실이 없는데도 피해액 일부를 무조건 배상하라는 요구는 지나치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굳이 따지자면 은행의 책임 순위는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경찰과 스마트폰 탈취를 차단하지 못한 통신사에 이어 세 번째”라면서 “해외 보이스피싱 일당을 못 잡으니 만만한 은행만 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은행권은 일단 예방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5대 은행 모두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FDS)을 고도화하고 각사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스마트폰 탈취 앱 설치 여부를 탐지하는 기능을 탑재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사례 교육을 하고 보험 계열사를 통해 우수 고객 등에게 무료 배상 보험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곳도 있다. KB국민은행은 정부의 대책 발표 직후 11명이던 모니터링 직원을 25명으로 두 배 이상 늘렸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