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과 인연 때문에”…대학 교직원이 무보수로 실용서적 출간한 사연

입력 2025-09-04 09:59 수정 2025-09-04 10:02
김형진 행정실장은 “이 책은 전문적인 이론서를 넘어 시각장애를 지닌 영유아 부모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참고서”라고 말했다. 대구대 제공


대구대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김형진(55) 행정실장이 2년여의 노력 끝에 일본의 장애 전문서적 ‘시각장애 영유아의 발달과 육아’를 번역·출간해 눈길을 모은다.

이 책은 시각장애 영유아를 양육하는 부모와 돌봄 제공자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실용 안내서다. 평범한 대학 교직원이 재능기부로 450쪽 분량의 전문서적을 번역해 출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책은 1970년대 일본 도쿄도 심신장애인복지센터에서 약 10년간 시각장애 영유아를 관찰하고 지도한 기록을 토대로 1980년에 발간된 ‘육아수첩’을 새로 정리한 것이다.

가가와 스미코 등 일본 연구진이 사례를 보강하고 최신 정보를 더해 2023년 개정판으로 다시 펴냈으며 ‘육아수첩’ 출간 이후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담고 있다.

김 실장이 번역에 나서게 된 계기는 한 일본인과의 특별한 인연에서 출발했다.

주인공은 대구에서 ‘즐거운 우리 집’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던 오카다 세쓰코 씨로 그는 도쿄도립심신장애인복지센터 상담사와 대학교수로 일한 뒤 80대의 나이에 한국으로 건너와 2013년부터 가정폭력 피해 아동을 돌보는 시설을 운영했다. 김 실장은 당시 맡고 있던 자원봉사 업무를 통해 오카다 씨와 인연을 맺었다.

코로나19로 사회복지시설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오카다 씨는 과거 동료들과 함께 묵혀 뒀던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바로 ‘육아수첩’을 현대 사회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오카다 씨와 연구진의 노력 끝에 2023년 ‘시각장애 영유아의 발달과 육아–가족과 돌보는 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책이 나오자마자 오카다 씨는 김 실장에게 연락해 한국어판 출간을 제안했다.

김 실장은 여러 전문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고 본인이 번역을 맡지 않으면 한국 출간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고민 끝에 김 실장은 무보수로 번역을 맡기로 하고 지인이 운영하는 독립출판사 빈서재(대표 정철)가 출판을 담당하면서 한국어판 출간이 현실화됐다. 일본 쪽 출판사 영지사 역시 저자들의 동의를 받아 인세 없이 출판 권한을 제공하며 힘을 보탰다.

‘시각장애 영유아의 발달과 육아’ 대구대 제공


지난 1997년 대구대에 입사한 김 실장은 일본어 전공자가 아니다. 그는 2004년 대학 교직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서 처음 일본어를 접한 뒤 꾸준히 공부를 이어왔다.

이전에도 음악 서적이나 교양서를 번역한 경험은 있었지만, 450쪽이 넘는 전문 서적을 맡은 것은 그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특히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근무하던 2년 동안은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모두 투자해 번역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빈서재 정철 대표와 오카다 씨가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2년여의 긴 여정 끝에 지난 6월 말 번역이 완료됐고 지난 1일 한국어판이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대구대 유아특수교육과 학과장이자 한국유아특수교육학회 회장인 백상수 교수가 한국어판 서문을 써줬고 오카다 씨도 한국어판 저자 후기를 보내오며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했다. 때마침 일본어판의 중쇄도 결정돼 기쁨이 더했다.

이 책은 제1편 영아편(출생 후 만 1세 반까지)부터 제4편 유치원편(유치원 생활 적응)까지 각 단계에서 시각장애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들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시각장애 아동의 능동적인 탐색과 오감 활용, 놀이를 통한 발달 촉진, 언어 발달의 중요성, 기본 생활 습관 자립, 사회 속에서의 양육과 통합 교육 등 5가지 핵심 원칙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지침을 담고 있다.

김 실장은 “대학에서 장애학생 지원 업무를 하다 보면 ‘우리 학생들이 영유아 시기에 제대로 된 교육과 생활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장애가 있든 없든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들의 발달과 미래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전문적인 이론서를 넘어 시각장애를 지닌 영유아 부모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참고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산=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