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한 병동. 늘 환자복을 입던 열두 살 소율이는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의사 가운을 입었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이를 위한 의료진의 선물이었다. 나중에 커서 의사가 되겠다는 소율이는 그동안 병원에서 특별 수련 과정을 받았다. 평소 담당 의사는 아이를 후배 의사로 대하며 함께 의학 용어를 공부하고 약식 수련을 해온 것이다. 특별 수련 수료증과 의사 가운을 받은 소율이는 투병 중 늘 함께해 온 놀이치료사와 가족 그리고 병원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꼬마 의사가 됐다.
3년 이상 입·퇴원을 반복하며 힘든 치료를 이어가던 준호(가명)는 병세가 더 깊어지기 전에 자신의 삶과 사랑을 담은 노래를 어머니에게 선물하고 싶어 했다. 준호의 소원은 음악치료사와의 오랜 협업 끝에 한 편의 자작곡으로 완성됐다. 병동 한쪽에 마련된 작은 콘서트에서 아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어머니 앞에서 불렀다. 그 멜로디와 가사에 청중은 눈시울을 붉혔다.
31일 세브란스병원에 따르면,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빛담아이’는 소율이와 준호처럼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삶이 병상 위에서 멈추지 않도록 돕고 있다. 질병과 증상을 치료한다는 일반 의료의 관점을 넘어서, 아이와 가족이 치료 전 과정에서 겪는 심리·사회적, 영적 어려움까지 보살펴 전생애 동안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사회복지사, 미술·놀이·음악 치료사, 성직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팀으로 움직인다. 세브란스병원은 2003년 국내 최초로 소아청소년 환자와 가족을 위한 완화의료를 시작해 2022년 병원에 오기 어려운 중증소아들의 집을 찾아가는 재택 의료까지 확장했다.
병원 수익만 생각한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수의 환자에게 집중해야 하는 완화의료팀에 인력을 투입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병원 입장에서 보면 온전히 ‘비용’에 가깝기 때문이다. 팀의 의료진은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우리 병원이 가진 기독교적 소명과, 일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문화 덕분”이라며 “전국에 재택의료팀까지 운영되는 곳은 대형병원 4곳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아픈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다 같이 나눠야 할 몫인데, 그동안 이분들이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심층적인 치료가 아직 소수의 아이에게만 허락된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중증소아 재택의료 시범사업 2차 효과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정부의 시범사업 시작 이후 2023년까지 5년간 이 서비스를 이용한 환아는 누적 646명에 불과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희귀난치성질환으로 진료받은 20세 이하 소아청소년만 11만9000명이 넘는 것을 고려하면 의료 공백은 작지 않다.
환자 수요는 늘 서비스 공급을 넘어선다. 현재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재택의료팀은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재택 방문을 담당하는 간호사 두 명이 하루에 찾아갈 수 있는 가정은 평균 7~8곳 남짓이다. 한정된 인력으로 가장 절실한 아이를 먼저 도와야 하기에, 병원에서 30㎞ 이내에 거주하며 특정 의료기기에 의존하는 아이들을 우선 대상으로 한다. 휠체어를 타고라도 외래 진료를 올 수 있는 아이보다는 침상에 누워 병원 한번 오는 것이 전쟁 같은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웃던 소율이는 최근 혈관에 주삿바늘을 다섯 번이나 꽂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지켜보던 의료진이 “계속 찔러서 아픈 게 무서웠냐”고 묻자, 소율이는 망설임 없이 “결국 치료가 안 될까 봐 무서웠다”고 답했다. 소율이에게는 주삿바늘의 고통보다, 치료가 실패해 의사의 꿈을 이어가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그는 “저는 무섭지 않아요. 꼭 의사가 될 거거든요”라며 다시 한번 다짐하고 의사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의지는 의료진이 이 고된 일을 ‘좋아서 하는 일’이라 여기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불렀던 준호의 작은 콘서트에 참석한 한 의료진은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무슨 복을 받아 이 자리에 초대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한 작가의 글귀를 좋아한다는 그는 “제가 하는 일은 환아와 부모들의 경험을 전하고 제 의료 지식 일부를 알려주는 것이 전부인데, 세상에 있는 아픔들을 연결해 길을 만드는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