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 야만의 시대, 견디고 버텨야 했던 그녀들의 통쾌한 응징

입력 2025-08-27 17:32
영화 ‘애마부인’ 제작기를 통해 1980년대 부조리를 꼬집는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서 여배우 희란(이하늬)과 주애(방효린)이 말을 탄 모습. 극 중 희란이 연기한 에리카는 애마에게 “세상이 어떤 잔인한 폭력으로 너를 옥죄더라도 괜한 죄책감,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지 말고 너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천하장사 마돈나’ ‘독전’ ‘유령’ 등 영화에서 섬세한 연출을 보여준 이해영 감독의 첫 시리즈 연출작이다. 넷플릭스 제공

한국 영화계에서 ‘애마부인’은 강렬한 상징이다. 나체로 말을 탄 여인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작품은 1980년대 에로티시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적나라한 타이틀의 에로영화들이 쏟아졌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성(Sex) 산업을 장려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이 불을 지폈다. 남성의 욕망 충족에 몰두했던 당대 작품들은 사실상 여성 착취의 산물이었다.

넷플릭스 6부작 시리즈 ‘애마’는 그 야만의 시대를 신랄하게 까발린다. 1982년 공전의 히트작 ‘애마부인’ 제작 과정을 배경으로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소비하던 당시 충무로 영화판을 고발한다. 더 이상의 노출을 거부한 당대 최고 여배우 정희란(이하늬)과 그가 거절한 애마부인 역을 오디션으로 따낸 신예 신주애(방효린)가 서사의 중심에 선다.

처음엔 서로 견제하며 기싸움을 벌이는 진부한 구도로 출발한 이들의 서사는 고위층 연회 접대부로 불려 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며 뜻밖의 반전을 맞게 된다. 무도한 권력의 부조리 아래서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동병상련을 느낀다. 영화를 위해 무슨 일이든 불사하는 열정까지도 두 사람은 똑 닮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작품은 이들의 연대를 통해 힘찬 반격으로 나아간다. 희란은 여성을 상업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제작사 대표 구중호(진선규)에게 맞서 주먹을 날리고 총구까지 겨누며 적극 저항한다. 중호가 저질스러운 편집으로 망친 ‘애마부인’ 필름을 태우려는 희란의 행동엔 주애가 동참한다. “모멸감에서 절 구원해 주셨는데 선배님도 구원받으셔야죠”라면서.

희란과 주애가 말을 타고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를 역주행해 질주하는 장면은 작품의 메시지를 응축해 보여준다. 대종상 시상식에서 권력에 영합한 영화계 비리를 폭로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희란을 주애가 구해낸 그 순간,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맞는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기꺼이 거스르는 이들을 통해 ‘애마부인’ 속 말 타는 이미지는 보란 듯이 전복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에 등장하는 극장 세트장. 넷플릭스 제공

실제 ‘애마부인’ 주연이었던 배우 안소영의 특별출연은 당대 여성 배우에게 바치는 존경과 헌사다. 시상자로 깜짝 등장한 그는 “돌이켜보면 영광스럽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고 말한다. 작품 속 ‘애마’는 영화의 주인공에 머물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 자신을 지켜온 모든 여성으로 확대된다. 이해영 감독은 “애마란 이름은 단순히 ‘애마부인’ 주인공의 개념이 아니라 오해와 편견을 견디며 살아낸 여성의 상징”이라며 “‘애마’는 그 견딤과 버팀을 지지하는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작품은 에로영화를 장려하면서도 강력한 심의·규제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시대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검열을 피하고자 작품명의 말마(馬)를 삼마(麻)로 바꾼 실화 기반의 에피소드는 헛웃음을 자아낸다.

말투부터 꾸밈, 의상까지 그 시절을 완벽히 재현한 배우들의 호연과 이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화가가 그린 극장 간판, 충무로 사랑방이었던 청맥 다방 같은 공간 재현은 80년대 충무로를 생생히 불러낸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