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 같은 중증 무발화 자폐아도 깊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내 행동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도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 불의한 일을 보면 화가 나고, 부당함에 슬퍼진다. 나는 그저 가리워진 길에서 빛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다른 모습의 사람’일 뿐이다.”
이 글은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26일 발표한 ‘제11회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아동·청소년 부문 대상(밀알복지재단 이사장상)을 받은 중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박주환(15)군의 수필 ‘숫자 2의 기적’의 한 구절이다. 이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진솔한 이야기를 발굴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목적으로 2015년부터 시작됐다. 올해 공모전에서도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다양한 장면이 글로 담겼다.
자폐 스펙트럼 전문가들은 박군과 소통이 불가능할 거라 단언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선 긋기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 수없이 눈물을 흘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민 ‘1번 사과 2번 딸기 아이스크림’이라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박군은 마침내 숫자 ‘2’를 써내려가며 세상과 처음으로 소통했다.
숫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단어가 됐고, 박군이 일곱 살 무렵에는 마침내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라는 문장으로 피어났다. 그 한 문장을 위해 수만 번 연필을 쥐었던 아이는 이제 자신의 내면을 담은 글로 세상에 말을 건네는 소년 작가가 됐다.
일상 부문 대상(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은 김현지(25)씨의 글 ‘내 동생의 쓸모’는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김씨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동시에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누워 지내는 것 외에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동생을 보며 존재 이유를 고민했다.
그 답을 찾게 된 것은 동생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을 때였다. 김씨는 동생이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족을 행복하게 하고, 또 말없이 위로를 준다는 것을 느꼈다.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씨는 글로 사람의 가치는 성취가 아닌 존재 자체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장애를 통해 특수교사로서의 새로운 길을 연 이야기 ‘장애가 있는, 그래서 더 가까운 특수교사입니다’는 고용 부문 대상(고용노동부 장관상)을 받았다. 박항승(38)씨는 네 살 때 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지만 특수교사의 꿈을 키웠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학교 관계자들은 면접에서 그의 장애를 보고는 “아무래도 장애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40곳 가까이 그를 외면했다.
마침내 교단에 선 그는 자신의 장애를 살아있는 교육으로 삼는다. 그는 한 팔로 체조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말한다. “자, 두 팔을 위로 올리세요.” 이어서 “선생님은 팔이 하나라서 이렇게 올린 거야. 사람의 몸은 이렇게 다를 수도 있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몸으로 직접 다양성을 가르친다.
일상 부문 최우수상(국민일보 사장상)으로 선정된 이재용(41)씨는 ‘목소리로 걷는 사람’이라는 글을 통해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아버지의 삶을 따라간다. 건설기술자였던 아버지는 현장 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침묵에 빠졌다. 집안을 채운 것은 지팡이 소리와 고통을 참는 헛기침뿐이었다고 한다. 콜센터 상담사로 새 출발한 아버지는 서툰 손으로 대본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며 연습했다. “덕분에 하루가 괜찮아졌다”는 한 고객의 말에, 이씨는 목소리로 다시 세상에 서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은 향후 오디오북과 웹툰 등 장애인식개선 콘텐츠로 제작돼 대중에게 소개될 예정이다. 수상작 전문은 밀알복지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상식은 다음달 26일 열린다. 아래는 박군의 글 전문.
숫자 2의 기적/박주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돌 무렵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내뱉으며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나는 좀 달랐다.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 일곱 살 무렵 내가 처음 쓴 한 줄의 글은 엄마의 눈물과 콧물을 터뜨렸고, 그렇게 나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말이 아닌 글로 시작된 나의 소통. 그 순간은, 세상이 처음 내 글에 귀 기울여준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중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감각장애와 실행증이 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무언가 혼자서 해보려 해도 정확도가 너무 떨어져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내 몸은 건강하다. 수영도 할 수 있고, 달리기도 잘한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더 괴롭게 한다. 몸은 멀쩡한데, 내 안에 가득 찬 말들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답답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나보다 이 답답함을 더 절절히 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다. 어릴 때 나를 진단한 의사 선생님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밥 세 끼 잘 챙겨 먹이고, 안전하게 지내는 정도만 돌보세요. 교육은 전문가인 치료사에게 맡기시구요.” 내가 만난 많은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엄마에게 나의 한계를 설명했고, 그 한계를 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를 남이 대신 정하게 두지 않으셨다. 내가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 내가 진짜로 스스로 서는 길을 찾기 위해 엄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나를 다른 기준으로 키우지 않으셨다. 내 또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고, 엄마는 늘 용기를 주셨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엄마는 내 손에 연필을 쥐어 주셨다. 나는 매일 엄마 손을 잡고 스케치북 위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옆으로 그어봐’라고 말해도, 나는 자꾸 아래로, 혹은 대각선으로 선을 그었다. 실행증 탓에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노력 해도, 내 손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중해봐도, 내 손끝은 언제나 내 의지와 어긋났다. 다른 아이들에겐 너무나 쉬운 ‘선 긋기’가 나에게는 아무리 온 힘을 다해도 넘을 수 없는, 높은 성벽 같았다. 매일매일 나는 선을 긋고, 또 긋고, 울고 또 울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지겨운 반복 속에서도 엄마는 멈추지 않으셨다. 아니,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두시고 먹고 싶다는 ‘표현’만 하면 얼마든지 주시겠다고 했다. “주환아! 스케치북에 줄을 긋든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든지… 먹고 싶다고 표현해보자.” 하지만 나는 다른 곳을 바라봤고, 줄도 엉뚱한 방향으로 그었다. 하루하루가 제자리 걸음이었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던 나에게도 분명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이젠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아무리 연습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매일 내 손을 잡고 함께 연습한 엄마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나의 아주 작은 변화들을 온몸으로 느끼고 계셨다. 엄마는 나에게서 희망을 보셨다. 그리고 나는 그 희망이 얼마나 고된 기다림 속에 피어난 것인지 알았다. 때로는 힘든 연습에 엄마가 미웠고, 눈물만 흘렸던 날도 있었지만, 엄마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의사표현만 할 수 있으면 돼. 서툴러도 표현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알아보고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힘내자!” 하지만 선긋기는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었다. “주환아! 우리 차라리 글쓰기를 연습해볼까?” 선긋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글자부터 시도해보자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날부터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남들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글씨를 쓰고 싶어 열심히 연습했다. 그 시절 우리집엔 연필, 색연필, 스케치북이 아주 많았다. 엄마는 ‘의사소통은 불가능할거다’ 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나를 데리고 문구점에 가서 예쁜 필기구를 직접 고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려고 하면 다 되는거야.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런 말을 매일 들으며, 내 마음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켜졌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도 멋지게 해내고 말테다.’
엄마는 이제 우리도 학교에 가야 하니 글쓰기 연습을 더 열심히 해 보자며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셨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할 수 있다고 확신하셨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셨다. 나 역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손에 내 손을 포개어, 매일같이 기역, 니은, 디귿을 수백, 수천 번씩 써 내려갔다. 그 뜨거운 연습의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과 연결되는 나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권씩 책을 읽어 주셨다. 내가 그 책들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할 시기니까 엄마는 그저 그렇게 하신 거다. 나는 이미 엄마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동영상 동요 자막으로 한글을 완벽 하게 익힌 상태였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겉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을 가리고 있을 때가 많다. 매일매일, 엄마는 내 옆에 앉아 목이 아프도록 책을 읽어 주셨고 나는 손을 이상하게 꼼지락거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모르셨다. 나도 그때 엄마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는 그 사소한 행동조차도 어려워 엄마가 대신 넘겨 주셨지만, 엄마가 한 장 한 장 넘겨주시던 책장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이 세상을 탐색했고 나의 세상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첫마디를 내 뱉을 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엄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와 소통하려 애쓰셨다. 그 중 하나는, 스케치북에 질문을 크게 쓰고 두 가지 선택지를 주시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색깔은?” 1. 노란색 2. 초록색 나는 선을 긋거나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어느 날, 엄마와 공부를 마친 뒤 엄마는 또 내게 물으셨다. “공부를 다 하고 먹고 싶은 건?” 1. 사과 2. 딸기 아이스크림 나는 조심스럽게 ‘2’ 라고 써 내려갔다. 엄마는 깜짝 놀라 나를 꼭 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도 하셨고, 그날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와 나는 놀이처럼 질문하고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얼마나 즐거우셨을까? 비록 단순한 숫자로 나누는 대화 였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가 엄마에겐 엄마나 벅찬 기쁨이었을까.. 평소처럼 엄마와 공부를 마친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또 질문하셨다. “혹시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엄마는 연필을 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으셨다. 나는 그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 힘으로 써 내려갔다.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 엄마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그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수천 수만 번 선을 그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처럼 내 마음을 엄마에게 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중증 무발화 자폐도 깊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나도 안다. 내 행동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나도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 불의한 일을 보면 화가 나고, 부당함에 슬퍼진다. 나는 그저 가리워진 길에서 빛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다른 모습의 사람’일 뿐이다. 남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선에 갇혀 슬퍼하기엔, 나의 삶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하다. “오랫동안 꿈을 꾼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조금씩, 그리고 간절하게 꿈을 향해 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돌 무렵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내뱉으며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나는 좀 달랐다.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 일곱 살 무렵 내가 처음 쓴 한 줄의 글은 엄마의 눈물과 콧물을 터뜨렸고, 그렇게 나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말이 아닌 글로 시작된 나의 소통. 그 순간은, 세상이 처음 내 글에 귀 기울여준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중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감각장애와 실행증이 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지만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무언가 혼자서 해보려 해도 정확도가 너무 떨어져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내 몸은 건강하다. 수영도 할 수 있고, 달리기도 잘한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더 괴롭게 한다. 몸은 멀쩡한데, 내 안에 가득 찬 말들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답답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나보다 이 답답함을 더 절절히 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다. 어릴 때 나를 진단한 의사 선생님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밥 세 끼 잘 챙겨 먹이고, 안전하게 지내는 정도만 돌보세요. 교육은 전문가인 치료사에게 맡기시구요.” 내가 만난 많은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엄마에게 나의 한계를 설명했고, 그 한계를 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를 남이 대신 정하게 두지 않으셨다. 내가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 내가 진짜로 스스로 서는 길을 찾기 위해 엄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나를 다른 기준으로 키우지 않으셨다. 내 또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고, 엄마는 늘 용기를 주셨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엄마는 내 손에 연필을 쥐어 주셨다. 나는 매일 엄마 손을 잡고 스케치북 위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옆으로 그어봐’라고 말해도, 나는 자꾸 아래로, 혹은 대각선으로 선을 그었다. 실행증 탓에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노력 해도, 내 손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중해봐도, 내 손끝은 언제나 내 의지와 어긋났다. 다른 아이들에겐 너무나 쉬운 ‘선 긋기’가 나에게는 아무리 온 힘을 다해도 넘을 수 없는, 높은 성벽 같았다. 매일매일 나는 선을 긋고, 또 긋고, 울고 또 울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지겨운 반복 속에서도 엄마는 멈추지 않으셨다. 아니,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두시고 먹고 싶다는 ‘표현’만 하면 얼마든지 주시겠다고 했다. “주환아! 스케치북에 줄을 긋든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든지… 먹고 싶다고 표현해보자.” 하지만 나는 다른 곳을 바라봤고, 줄도 엉뚱한 방향으로 그었다. 하루하루가 제자리 걸음이었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던 나에게도 분명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이젠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아무리 연습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매일 내 손을 잡고 함께 연습한 엄마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나의 아주 작은 변화들을 온몸으로 느끼고 계셨다. 엄마는 나에게서 희망을 보셨다. 그리고 나는 그 희망이 얼마나 고된 기다림 속에 피어난 것인지 알았다. 때로는 힘든 연습에 엄마가 미웠고, 눈물만 흘렸던 날도 있었지만, 엄마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의사표현만 할 수 있으면 돼. 서툴러도 표현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알아보고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힘내자!” 하지만 선긋기는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었다. “주환아! 우리 차라리 글쓰기를 연습해볼까?” 선긋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글자부터 시도해보자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날부터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남들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글씨를 쓰고 싶어 열심히 연습했다. 그 시절 우리집엔 연필, 색연필, 스케치북이 아주 많았다. 엄마는 ‘의사소통은 불가능할거다’ 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나를 데리고 문구점에 가서 예쁜 필기구를 직접 고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려고 하면 다 되는거야.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런 말을 매일 들으며, 내 마음속에서도 환하게 불이 켜졌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도 멋지게 해내고 말테다.’
엄마는 이제 우리도 학교에 가야 하니 글쓰기 연습을 더 열심히 해 보자며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셨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할 수 있다고 확신하셨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셨다. 나 역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손에 내 손을 포개어, 매일같이 기역, 니은, 디귿을 수백, 수천 번씩 써 내려갔다. 그 뜨거운 연습의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과 연결되는 나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권씩 책을 읽어 주셨다. 내가 그 책들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할 시기니까 엄마는 그저 그렇게 하신 거다. 나는 이미 엄마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동영상 동요 자막으로 한글을 완벽 하게 익힌 상태였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겉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을 가리고 있을 때가 많다. 매일매일, 엄마는 내 옆에 앉아 목이 아프도록 책을 읽어 주셨고 나는 손을 이상하게 꼼지락거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모르셨다. 나도 그때 엄마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는 그 사소한 행동조차도 어려워 엄마가 대신 넘겨 주셨지만, 엄마가 한 장 한 장 넘겨주시던 책장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이 세상을 탐색했고 나의 세상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첫마디를 내 뱉을 순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엄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와 소통하려 애쓰셨다. 그 중 하나는, 스케치북에 질문을 크게 쓰고 두 가지 선택지를 주시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색깔은?” 1. 노란색 2. 초록색 나는 선을 긋거나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어느 날, 엄마와 공부를 마친 뒤 엄마는 또 내게 물으셨다. “공부를 다 하고 먹고 싶은 건?” 1. 사과 2. 딸기 아이스크림 나는 조심스럽게 ‘2’ 라고 써 내려갔다. 엄마는 깜짝 놀라 나를 꼭 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도 하셨고, 그날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와 나는 놀이처럼 질문하고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얼마나 즐거우셨을까? 비록 단순한 숫자로 나누는 대화 였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가 엄마에겐 엄마나 벅찬 기쁨이었을까.. 평소처럼 엄마와 공부를 마친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또 질문하셨다. “혹시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엄마는 연필을 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으셨다. 나는 그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 힘으로 써 내려갔다. “엄마, 이제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까,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좀 하세요.” 엄마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그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수천 수만 번 선을 그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처럼 내 마음을 엄마에게 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중증 무발화 자폐도 깊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나도 안다. 내 행동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나도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 불의한 일을 보면 화가 나고, 부당함에 슬퍼진다. 나는 그저 가리워진 길에서 빛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다른 모습의 사람’일 뿐이다. 남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선에 갇혀 슬퍼하기엔, 나의 삶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하다. “오랫동안 꿈을 꾼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조금씩, 그리고 간절하게 꿈을 향해 가고 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