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현 “언젠가 파리오페라발레의 별이 되고 싶다”

입력 2025-08-24 10:57 수정 2025-08-24 13:05
파리오페라발레의 강호현이 2024-2025시즌을 마치고 여름 휴가로 잠시 귀국했가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강호현은 지난 1월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차상위 등급인 프리미에르 당쇠즈로 승급했다. 한국인으로는 에투알 박세은에 이어 두 번째 쾌거다. 최현규 기자

파리오페라발레는 355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최정상의 발레단이다. 150여 명의 정단원들은 5단계로 구분되는데, 카드리유(군무)-코리페(군무 리더)-쉬제(솔리스트)-프리미에르 당쇠르/당쇠즈(남녀 퍼스트 솔리스트)-에투알(수석무용수) 순이다.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별’이란 뜻이다. 지난 1월 발레리나 강호현은 두 번째 등급인 프리미에르 당쇠즈로 승격했다. 한국인으로는 에투알 박세은에 이어 두 번째 쾌거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마치고 2017년 준단원으로 입단한 강호현은 이듬해 오디션에서 1위를 차지하며 정단원인 카드리유가 된 이후 2019년 코리페, 2023년 쉬제로 승급한 바 있다. 2024-2025 시즌을 마치고 여름 휴가 기간에 해외 갈라 공연에 참가했다가 잠시 한국에 돌아온 강호현을 최근 만나 승급 이후의 변화와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승급 콩쿠르 없이 예술감독 지명으로 승급

강호현이 지난 3월 파리오페라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오로라 공주로 출연하고 있다. 지난 1월 이 작품의 언더스터디로 연습하고 있던 강호현은 정식 주역 출연과 함께 프리미에르 당쇠즈 승급 소식을 들었다. (c)파리오페라발레

“지난 1월에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언더스터디(대역)로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요. 호세 마르티네스 예술감독님의 호출을 받고 감독실에 들렀습니다. 3월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에 언더스터디가 아니 정식 주역으로 1회 출연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소식이라 기뻐하고 있는데, 승급까지 발표하셨어요. 당시 기쁨과 조심스러움의 감정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파리오페라발레는 에투알의 경우 예술감독이 이사회와 논의를 거쳐 지명하고, 그 아래 등급은 매년 11월 승급 콩쿠르를 치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지난 2022년 12월 마르티네스 감독 취임 이후 발레단 내에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술감독이 이번 시즌까지 콩쿠르 없이 한시적으로 승급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두 시즌 동안 승급된 소수의 무용수 가운데 한 명이 강호현이다.

강호현은 “발레단에서 승급 콩쿠르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꾸준히 개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시즌부터 개선된 방식으로 승급 콩쿠르가 부활하는데, 그 중간에 내가 무용수들에게 부담감이 큰 콩쿠르를 치르지 않고 감독 지명으로 승급했다는 점에서 정말 운이 좋았다”고 피력했다.

“주역 된 만큼 여유 생겼지만 책임감도 커져”

강호현이 파리오페라발레의 ‘돈키호테’에서 키트리 역할로 춤추고 있다. 강호현은 이 작품으로 파리오페라극장이 매 시즌 오페라단과 발레단 소속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젊은 예술가들에게 주는 AROP상을 받았다. (c)파리오페라발레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프리미에르 당쇠즈는 에투알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주역을 맡는 만큼 모든 공연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조역과 군무를 오가는 쉬제부터 그 아래 등급은 공연에 서지 않아도 무대 뒤에서 대기해야 하는 것과 천양지차. 강호현은 “프랑스에 온 이후 처음으로 나만의 저녁이 생겼다. 그동안 공연 끝나고 집에 가면 밤 11시였기 때문에 잠을 자기 바빴다. 그런데, 프리미에르 당쇠즈 승급 이후 공연이 없는 날은 집에서 요리랑 청소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면서 “무엇보다 개인 연습과 함께 재활 치료 등 몸 관리에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어 좋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군무로 매일 무대에 설 땐 피곤해도 부담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주역을 맡으면서 책임감이 커진 만큼 리허설부터 긴장감이 더 든다”고 덧붙였다.

승급에 따라 연봉도 많이 인상됐을 것 같다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프랑스의 경우 워낙 세금이 높기도 하지만, 파리오페라발레 단원들의 연봉 자체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란다. 다만 지난 1월 프리미에르 당쇠즈 승급으로 외부 갈라 공연에 자주 초청되는 데 따른 부수입이 생긴 게 큰 변화다. 당장 이번 여름에 그는 파리오페라발레가 북유럽 3개국을 도는 크루즈선과 공동으로 주최한 갈라 공연에 출연한 데 이어 일본 도쿄에서 영국 로열발레단과 파리오페라발레 주역들이 모인 갈라 공연 ‘발레 슈프림’에도 초청받았다. 그는 “이런 갈라 공연은 개런티만이 아니라 뛰어난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 굉장히 영광스럽다”고 강조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에투알 승급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강호현은 활짝 웃었다. 그는 “당연히 되고 싶지만 에투알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감독과 이사회의 결정, 에투알 티오(남녀 합쳐 16명) 등 여러 요소가 다 맞아야 한다”면서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자리가 났을 때 준비된 사람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꾸준히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내성적이었던 어린 시절 발레 배우며 성격 바뀌어

발레리나 강호현이 지난 2022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드라마 발레 ‘마이얼링’ 여주인공 마리 베체라 역으로 연기하고 있다. 당시 강호현은 코리페였지만 주역으로 발탁됐고,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여 발레단에 자신을 각인시켰다. (c)파리오페라발레

실제로 그는 청소년 시절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이 쌓이자 성인이 되면서 기량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발레를 배우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어릴 때 너무 내성적이어서 유치원에도 적응 못 한 그는 언니가 수영을 배우던 스포츠센터에 따라갔다가 옆에서 진행하던 발레 수업을 받게 됐다. 그는 “발레는 말없이 춤만 추면 되니까 잘 적응했던 것 같다. 습관처럼 매일 발레 학원을 가다 보니 내가 어느새 전공하고 있었다. 전공 선택에 대한 고민의 순간도 없이 그냥 당연하게 발레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내성적이었던 그의 성격도 발레를 하면서 점차 바뀌었다. 발레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 그는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는 “생각을 말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단어의 선택이나 뉘앙스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으로 전달하는 것은 말보다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발레의 경우 춤추는 사람의 성격이 춤에 다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반 시절 파리오페라발레 입단 오디션에 도전한 것도 발레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바뀐 성격 덕분이다. 파리오페라발레 부속 발레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준단원 오디션부터 치러야 했지만, 그는 경험을 쌓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을 봤다가 합격했다. 이듬해 정단원 입단 오디션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지만, 그때가 그에겐 파리오페라발레에서 겪은 최고 위기의 순간이었단다.

“최악의 순간에 치른 정단원 오디션 기억에 남아”

강호현이 지난해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 ‘블레이크 웍스 I’에 출연하고 있다. 포사이스는 강호현이 카드리유 시절일 때 그의 ‘정확성의 아찔한 스릴’에 캐스팅할 정도로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c)파리오페라발레

“오디션을 사흘 앞두고 다쳐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집에선 수도 고장으로 샤워도 못 하고 화장실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휴대전화를 도둑맞고, 신용카드는 현금 입출금기에 끼어 버렸어요.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당시엔 프랑스어도 제대로 못 할 때라 난맥상이었어요. 다행히 친구에게 교통비를 빌려서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였던 극장에 갔습니다. 오디션을 치르지 않으면 아예 비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단원은커녕 연수단원 연장도 못 하고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라 목발을 던지고 무대에 섰어요. 괜히 문제 생길까 봐 진통제도 안 먹고요. 그렇게 치른 오디션에서 1위를 한 게 믿어지지 않아요.”

강호현은 이날 파리오페라발레에서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의 도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카드리유 시절 컨템포러리 발레의 거장 윌리엄 포사이스가 ‘정확성의 아찔한 스릴’(The Vertiginous Thrill of Exactitude)에 자신을 낙점한 덕분에 얼마 뒤 승급 콩쿠르에 영향을 끼쳐 좋은 평가를 받았단다. 코리페 시절에도 그는 케네스 맥밀란의 드라마 발레 ‘마이얼링’ 여주인공 마리 베체라 역으로 발탁됐다. 당시 공연에서 호평받은 그는 얼마 뒤 승급 콩쿠르를 거쳐 쉬제가 됐다.

그는 “발레단에서 카드리유에서 코리페로 올라가는 첫 단계가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포사이스 선생님 덕분에 나를 발레단에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포사이스 선생님은 지난해 ‘블레이크 웍스 I’를 올릴 때도 나를 기억하고 다시 캐스팅하셨다”며 “포사이스 선생님 외에도 ‘마이얼링’의 리허설 디렉터 등 감사를 드리고 싶은 분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파리오페라발레에선 다양한 춤을 출 수 있어”

파리오페라발레의 강호현이 2024-2025시즌을 마치고 여름 휴가로 잠시 귀국했가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최현규 기자

주변의 도움을 강조했지만 강호현은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클래식 발레, 네오클래식 발레, 컨템포러리 발레, 드라마 발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명언을 스스로 실천한 셈이다.

“파리오페라발레는 전 세계에서 레퍼토리가 가장 많은 데다 세계적인 거장과의 작업이 늘 있는 곳이에요. 연간 15~16편 정도가 올라가는데, 저는 다양한 장르의 춤을 출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아직 춰보지 못한 춤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어떤 춤을 추게 될지 기대돼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강호현이 무용수로서 앞으로 걸어갈 길이 궁금해진다.

파리오페라발레의 강호현이 2024-2025시즌을 마치고 여름 휴가로 잠시 귀국했가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최현규 기자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