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음악 거장 헤레베허 “시대 연주로 바흐가 상상했던 소리를 찾아갑니다”

입력 2025-08-23 12:02
고음악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필리프 헤레베허. (c)크레디아

오는 9월은 유난히 바로크 음악 등 고음악을 당대 악기로 연주하는 시대 연주(역사주의 연주)가 많다. 이 가운데 클래식 팬들의 관심이 가장 높은 것은 아무래도 고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필리프 헤레베허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b단조 미사’ 내한공연이다. 9월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19일 대전예술의전당, 20일 아트센터 인천에서 한국 관객과 만난다.

벨기에 출신의 지휘자 헤레베허는 원래 정신과 의사였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의대생이던 1970년 겐트 대학 친구들과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창단했다. 이후 지휘자로 전업한 그는 라 샤펠 르와얄, 상트 뮤직 아카데미, 앙상블 보칼 외로펭, 샹젤리제 오케스트라 등 시대 연주 단체와 축제를 설립하거나 예술감독을 맡으며 고음악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아르모니아 문디, 버진 클래식, 펜타톤 등의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음반은 100장이 넘는다.

이번 내한 레퍼토리인 바흐 ‘b단조 미사’는 바흐 생애 후기에 작곡된 걸작으로 그가 남긴 성악 작품 전체를 집대성한 결정체라 불린다. 웅장한 푸가, 섬세한 솔로, 극적인 합창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종교 음악의 진수다. 헤레베허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이 작품을 세 차례 녹음하기도 했다. 내한을 앞둔 헤레베허와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 2023년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이후 2년 만이다. 한국을 다시 찾는 소감은?
“다시 한국에 오게 되어 기쁘다. 특히 이번에 내가 이끄는 또 다른 단체인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와 함께 가게 되어 기대가 크다.”


- 바흐의 b단조 미사를 한국에서는 19년만에 선보인다. 이 작품이 바흐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평생 이 곡을 200번 정도 지휘했지만,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곡은 엄밀히 말해 전례 음악이 아니다. 바흐가 한 번에 작곡한 작품이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쓴 여러 악장들을 모아 말년의 음악적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수십 년의 경험, 신학적 깊이, 대위법적 완성도, 그리고 영적인 힘이 응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 바흐의 수난곡과 비교해 b단조 미사를 지휘했을 때는 상쾌함을 느낀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 있다. 자신에게 이 작품의 의미는?.
“바흐의 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나 수없이 연주했음에도 매번 악보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듣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포인트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창단한 배경은? 이 단체의 특징 또는 음악적 차별점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 음악을 하고 싶어 만든 단체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시작이다. 당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겐트 예수회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며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연주했다.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연주자들이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동료라기보다는 친구 같은 존재로서 함께 음악을 만드는 관계라는 점이 다른 단체와 차별된다.”

-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창단한 지 55년이 됐다. 오랜 시간 악단을 유지해온 원동력은?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는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 음악적 기반이자 집이다. 나와 연주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데, 내 경우 정신과 의사라는 길을 내려놓고 전업 음악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두 단체와 함께 음악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를 지휘자로서 신뢰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다음달 한국을 찾는 벨기에 출신의 거장 필리프 헤레베헤가 고음악 연주 단체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지휘하고 있다. (c)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를 창립했던 50년전과 지금 바로크 음악의 연주 관행과 관련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나?
“창단 무렵 바흐는 종종 대규모 합창단과 낭만적인 해석으로 연주되곤 했다. 우리는 연구를 거듭하며 더 투명하고 인간적인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혁명적으로 보였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에는 거의 당연시되고 있다. 역사주의 연주 관행은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엄청나게 발전한 동시에 다양성도 더욱 커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음악 자체에 대한 존중이다. 모든 세대가 바흐를 새롭게 듣고, 그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 특정 시대의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로 연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향수나 순수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바흐가 상상했던 소리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악기들은 더욱 투명하고 따뜻하며, 수사적인 명료함을 제공하여 음악의 구조와 의미를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목소리와 악기의 균형은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음악은 덜 거대하고 더 친밀하며 영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호흡한다. 이를 통해 바흐의 목소리가 ‘더 크게’가 아니라, ‘더 진실되게’ 전달된다.”

- 1970년대와 2020년대에 바흐의 음악이 가지는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과거에 바흐의 음악은 종종 위대한 전통의 일부로 여겨졌다. 장엄하고 고결하지만 어쩌면 다소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다. 오늘날 그의 음악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친밀하고 개인적인 것이 됐다. 역사주의 연주를 통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게 됐다.”

- 음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가?
“어떤 면에서 음악은 영적인 소통의 한 형태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심오한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음악은 언어가 없어도 고요, 긴장, 기쁨, 고통, 초월을 나눌 수 있게 해준다. 만약 공연을 통해 음악이 단순한 소리를 넘어, 마음과 정신을 동시에 울리는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