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이후 우울증을 겪다 실종된 소방관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트라우마 위험 주기에 맞춘 적극적인 점검 체계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건 발생 한참 뒤 증상이 발현되거나, 스트레스가 누적되는 트라우마 특성에 따라 시기별 ‘맞춤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관리 체계를 소방청 중심으로 일원화하고, 현행 프로그램의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21일 소방청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 소방본부는 소방대원들의 정신건강 관리를 위해 ‘동료 상담’ 등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행하고 있다. 소방청은 각 프로그램에 비용을 지원하고 주기적으로 운영 실태를 점검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소방청이 중앙 컨트롤타워가 되어 본부마다 산별적으로 흩어진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일부 광역 시·도 소방본부에서 시행하는 동료상담은 상담에 거부감을 가진 소방대원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출 효과적인 방법으로 꼽힌다. 상담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갖춘 동료들이 소방대원들의 심적 고충을 들어주는 방식이다. 외부 상담사에게는 마음을 터놓기 어려워하는 소방대원들도 업무적 공감대를 형성한 동료에게는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미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을 지낸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동료상담은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제도”라며 “이미 시행 중인 좋은 프로그램들을 중앙에서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운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의 다양한 특성을 반영한 ‘밀착형 지원’도 필요하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사람의 일부는 사건 초기에 덤덤하다가 6개월 이후 증상이 발현되는 ‘지연성 발현’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사건 초기 위기 관리 시스템에서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지 않을 수 있다. 또 트라우마 환자의 상당수가 스스로 증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여 치료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도 커진다. 이처럼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면 증상이 만성화되어 완치가 어려워진다.
이병철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미군은 자녀를 잃은 군인이 있으면 증상이 가장 강하게 발현되는 1주기에 맞춰 집으로 찾아가 상태를 살핀다”면서 “통상적인 위험 시기마다 전화로 상태를 점검하는 정도라도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체감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교수는 “(소방본부에서 제공하는) 상담, 진료비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병원에 내원하는 소방관들에게 이를 경험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없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림한강성심병원과 한림화상재단이 2023년 소방관 105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트라우마를 경험한 응답자 가운데 74%(354명)는 ‘치료 경험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현재 제공되는 트라우마 예방 및 대응 프로그램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평가한 응답자도 64.5%(682명)였다.
상담이 더욱 일상화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트라우마는 대형 참사가 아닌 일반적인 폭력·위험 상황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각종 사건사고에 대응하는 소방관의 경우 일상 곳곳에서 트라우마에 노출된 셈이다. 이렇게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을 맞닥뜨리더라도 또다시 스트레스를 느낀다. 이를 ‘복합 트라우마’라고 한다.
외부 전문 인력이 지역 소방본부를 방문해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찾아가는 상담실’도 운영되고 있지만, 현장 인력들은 이를 충분히 활용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 김성현 서울소방지부 구급국장은 “특정 요일과 시간을 예약한 뒤 본부까지 가서 상담을 받는 방식이라서 교대근무가 잦은 현장 대원이나 지역센터 직원들이 이용하기에는 불편함이 크다”며 “감기에 걸려서 동네 병원을 방문하듯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상담을 받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휴무를 활용하는 게 아닌 업무의 연장선 속에서 상담받을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상담에 소극적인 내부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조언이다. 심 센터장은 “소방청에서 해마다 ‘마음건강 설문조사’를 진행하지만 ‘인사팀에 알려질까 봐 두려워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 교수도 “병원에 내원한 환자들 가운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된다’며 심리검사 문항에 ‘0점’을 체크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며 “이를 개인의 숙제로 돌리기보다 인식 전환을 위한 소방청 차원의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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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