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부터 패션쇼까지…예배당은 지금 ‘문화 아레나’

입력 2025-08-19 13:05 수정 2025-08-19 16:38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이 17일 서울 중랑구 영안교회 예배당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 성가를 부르고 있다.

스페인 전통 의상을 입고 정열적 무대를 펼친 합창단이 2부에선 하늘빛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파란 눈의 낯선 합창단이 부르는 익숙한 ‘아리랑’ 선율이 예배당 가득 퍼졌다.

서울 중랑구 영안교회(양병희 목사)는 지난 17일 저녁 스페인 밀레니엄 합창단을 초청해 여름밤 특별한 무대를 열었다. 지역 주민과 교인 등 1300여명이 몰려든 예배당은 공연장이 됐다. 이번 공연은 종교색을 뺀 지역 문화행사에 가까웠다.

밀레니엄 합창단은 1999년 교포 임재식 지휘자가 스페인에서 창단했다. 단원은 모두 스페인 국영 라디오·TV 방송 합창단 출신의 전문 성악가 25명. 한국 가곡을 즐겨 불러 ‘한국 가곡을 부르는 외국 합창단’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날도 단원들은 한복을 입고 ‘보리밭’ ‘아름다운 나라’ 등 10여곡을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임재식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 지휘자가 17일 서울 중랑구 영안교회에서 관객들에게 합창단을 소개하고 있다.

영안교회는 올해 초 예배당 새 단장을 마친 뒤, 지역 문화 거점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준비해왔다. 공연에 온 임용길(75)씨는 “가까운 교회에서 세계적인 합창단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어 여름밤이 시원했다”고 전했다. 양병희 목사는 “예배와 더불어 주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버블 아티스트가 지난 5월 어린이날을 맞아 경기도 용인제일교회에서 버블쇼를 진행하고 있다. 용인제일교회 제공

경기도 용인제일교회(임병선 목사)는 예배당 개방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례로 꼽힌다. 교회는 2019년 9월 글로리센터 입당 이후 소극장 댄스연습실 녹음실 체육관 풋살장 탁구장 피시방 등 모든 시설을 지역에 개방해왔다.

교회에서는 음악회와 콘서트뿐 아니라 패션쇼까지 열린다. 용인시 내 유치원과 어린이집 학예회 장소로도 활용된다. 오는 11월에는 WBA 아시아 슈퍼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이 본당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용인대 교수인 교인의 제안으로 성사됐으며 선수단과 가족, 일반 관람객까지 약 1500명이 찾을 전망이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성도들은 의자와 물품을 정리해 주민들에게 공간을 내준다. 주일에는 예배당이 신앙의 자리지만 주중에는 누구나 드나드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는 셈이다.
용인지역 청소년들이 경기도 용인제일교회 체육관에서 농구를 즐기는 모습. 용인제일교회 제공

임병선 목사는 1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예배당 건물은 복음을 위한 도구라는 관점에서 지었다. 좌석도 전통적인 장의자가 아닌, 옮기기 편한 1인용으로 설치했다”며 “복싱 대회도 아직 믿음을 갖지 않은 분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드나들며 복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도록 문턱을 낮추는 시도의 하나”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예배당도 ‘공공재 교회’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새 예배당 입당 이후 교회 전체 시설을 지역사회에 개방했다. 본당은 6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3000석) 예술의전당(2500석) 보다 크다. 건축 단계부터 예배뿐 아니라 대중문화 공연을 염두에 두고 기둥을 제거하고 음향과 조명을 보강했다. 대규모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본당은 인근 중·고등학교 축제나 문화 공연 장소로도 사용된다.

입당 이후 지금까지 사랑의교회 본당에서 열린 공연과 행사는 200여건에 달한다. 서울시향 ‘우리동네 음악회’, 영화 상영, 호두까기 인형 발레 등이 대표적이다. 부속 공간까지 포함하면 500회 정도다. 2023년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 기간에는 각국 대원 6000여명이 교회에서 문화 행사를 즐겼다. 본당 대관은 무료 사용이 원칙이지만 무분별한 사용을 방지하고자 상황에 따라 최소한의 실비를 후원 형태로 받기도 한다.

서울 사랑의교회 예배당 지하 4층 복도에 전시된 길이 55m의 대형 작품 ‘바람이 임의로 불매-송화분분’ 전경. 사랑의교회 제공

교회 곳곳은 하나의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1층부터 지하 5층까지는 미디어 예술가 이이남의 ‘은혜의 폭포’(가로 5m, 세로 27m)가 설치돼 있고 지하 4층 복도엔 김병종 가천대 석좌교수의 대작 ‘바람이 임의로 불매-송화 분분’(세로 90cm, 가로 5520cm)이 걸려 있다. 왕실 도예 명인 박부원 장로의 달항아리, 청년 작가 데이비드 장의 대형 회화 등 300여점의 작품도 상설 전시 중이다. 오정현 목사는 “교회시설을 공공재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겠다”며 “교회가 도심 속 쉼터가 되도록 계속 개방하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과천소망교회(장현승 목사)는 교회 내 ‘로고스 미술관’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세계 어린이·청소년 미술대전’을 열어 1000명 가까운 아이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수상작은 교회의 관계망을 통해 중국과 일본의 화랑에도 전시한다. 지난해에는 샤갈, 쿠사마 야요이 등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을 초대했고 올해는 극사실주의 화가 윤병락 ‘사과’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서울 종교교회(전창희 목사)는 매월 세 번째 목요일 저녁 ‘광화문 음악회’를 연다. 정동제일교회(천영태 목사)는 창립 140주년을 맞아 지난 5월부터 ‘월요 정오음악회’를 이어가고 있다. 오는 11월까지 ‘바로크, 그 이야기’라는 주제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채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주임사제 박성순)은 다음 달부터 11월까지 매주 수요일 낮 바이올린·첼로·오르간 연주와 성악 무대를 연다.

글·사진=손동준 이현성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