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15일(현지시간) 알래스카 회담은 휴전 합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은 화기애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후 6년 만에 만난 푸틴 대통령을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부르며 “나는 푸틴과 환상적인 관계를 맺어왔다”고 했고,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이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 푸틴을 향해 “헛소리를 한다”며 비난 수위를 높여왔지만 정상회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환대했다. 트럼프는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 활주로에서 먼저 에어포스원에서 내린 뒤 레드카펫 위에서 푸틴을 기다렸다. 푸틴이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전용기에서 내려 다가오자 손뼉을 치며 환영했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했다. 푸틴이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으로 서방 국가의 땅을 밟은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대통령 전용 리무진 ‘더 비스트’에도 푸틴과 함께 탔다.
회담 뒤에도 푸틴 배려가 이어졌다. 트럼프는 미국 영토 내에서 열린 회담인데도 푸틴이 공동기자회견에서 먼저 발언하도록 안내했다. ‘평화 추구(PURSUING PEACE)’라는 배경 벽면 앞에서 총 12분간 이어진 공동 회견에서 푸틴은 8분간 발언했고, 트럼프는 4분만 말했다. 평소 다른 정상과의 회담에서 대화를 주도하던 장면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푸틴은 “전반적으로 나와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좋은 직접적인 소통을 유지하고 있다”며 “우리는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고, 전화상으로도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말했다. 푸틴이 발언하는 동안 트럼프는 내내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 마지막 부분에서 푸틴은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트럼프의 말에 영어로 “다음에는 모스크바에서?”라고 되물었다. “감사하다(Thank you)”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푸틴이 쓴 유일한 영어였다. 트럼프는 “오우, 흥미로운 제안”이라며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가능할 수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가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고성으로 면박을 주던 것과는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미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면도 있었다. 두 정상이 붉은색 카펫을 걸어가 ‘알래스카 2025’라고 적힌 연단 위에 올라가기 직전 하늘에서 B-2 스텔스 폭격기와 F-35 전투기가 상공에서 비행하면서 굉음을 냈다. 푸틴은 이동하면서 날아가는 B-2 폭격기 두세 차례 올려다 봤고, 트럼프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푸틴에게 말을 건넨 뒤 연단으로 이끌었다. B-2 폭격기는 이란 핵시설을 폭격했던 전투기다. 미 ABC방송은 “트럼프가 핵 강국인 러시아와의 회담을 앞두고 힘의 과시 차원에서 폭격기와 비행 편대를 파견하도록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