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알래스카 회담’이 예상대로 ‘노딜’로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 압박에서 방향을 바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합의를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각적인 휴전 대신 평화협정을 체결하라는 재촉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나 평화협정과 영토 문제 등 우크라이나전의 운명을 가를 결정을 논의한다.
트럼프는 지난 15일 알래스카주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푸틴과 약 3시간 동안 정상 회담을 했지만 휴전 합의는 발표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우리가 완전히 합의하지 못한 몇 가지 큰 것들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일부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합의하기 전까지는 합의한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푸틴은 “오늘 우리가 도달한 이해가 우크라이나의 평화로 가는 길을 열어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푸틴도 구체적 합의 사항을 밝히지 않은 채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이 필요하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이 회담에서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양보를 대가로 남부 헤르손과 자포리자 전선을 동결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은 현재 도네츠크의 약 70%를 장악하고 있고, 루한스크도 서쪽 끝 일부를 제외하고 점령한 상태다.
트럼프는 평소와 달리 취재진 질문도 받지 않았다. 휴전 논의에서 진전이 없으면서 예정됐던 확대 회담과 업무 오찬도 취소됐다.
트럼프는 푸틴을 만나고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젤렌스키와 유럽 각국 정상,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회담 결과를 알렸다.
트럼프는 통화 뒤 트루스소셜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끔찍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한 휴전 협정이 아닌 평화협정으로 직행하는 것”이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월요일(18일) 오후 백악관 집무실을 방문할 예정이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된다면 이후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 일정을 잡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회담 뒤 폭스뉴스와 진행한 단독 인터뷰에서 합의는 “젤렌스키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젤렌스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을 묻는 말에도 “합의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회담 전까지만 해도 푸틴을 향해 휴전 합의가 없으면 “심각한 후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회담 뒤에는 휴전보다는 광범위한 평화협정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휴전하지 않으면 러시아를 제재하겠다는 엄포도 사라졌다.
공을 넘겨받은 젤렌스키는 트럼프를 자극해 ‘판’이 깨지는 상황은 피하려는 모습이다. 젤렌스키는 16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러시아 정상회담 결과를 전달받은 직후 엑스에 “워싱턴DC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살육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모든 세부사항을 논의하겠다”며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3자 회담 제안을 지지한다”며 했다. 특히 “유럽인들이 미국과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안보 보장을 위해 모든 단계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 참여에 관련해 미국 측의 긍정적 신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말했다.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유럽 정상들도 이날 미·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달성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을 환영한다”며 치켜세웠다. 이들도 즉각적인 휴전 대신 평화 협정으로 직행해야 한다는 트럼프 의견에는 동의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보장 논의에 힘을 실었다.
이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할 준비가 됐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환영한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 보존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철통같은 안보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말했다.
푸틴은 영토 양보 등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제재는 피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트럼프와 공동 기자회견에서 “위기의 모든 근본 원인이 제거돼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포기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푸틴의 장기 평화협정 조건은 너무 광범위해 우크라이나와 유럽 지도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워 보인다”며 “트럼프는 푸틴과의 회담 이후 합의 달성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와 유럽으로 전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