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or보기] 대한민국 1호 프로 골퍼 연덕춘은 재평가돼야 한다

입력 2025-08-15 06:33
1941년 내셔널타이틀 대회인 일본오픈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고 연덕춘프로. 당시 그의 이름은 일본명인 노부하루 도쿠하라로 표기됐다가 84년만인 지난 4월에 본래 이름인 연덕춘을 되찾았다. KPGA

1941년 일본오픈서 연덕춘이 받은 우승 트로피. 이 트로피는 한국 전쟁으로 유실됐다가 복원돼 지난 12일 KPGA에 전달됐다. 향후 독립기념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KPGA

지난 12일 한일 양국 골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연덕춘의 신원을 회복하는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故 연덕춘, 역사와 전설을 복원하다’라는 행사가 개최됐다(왼쪽부터 류진 풍산그룹 회장, 문홍식 KPGA 고문, 김원섭 KPGA 회장, 야마나카 히로시 JGA 최고 운영 책임자, 강형모 KGA 회장, 문성욱 KPGA 프로). KPGA

일제 36년 강점기에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두 분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41년 일본오픈 골프선수권대회(이하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한국 1호 프로골퍼 연덕춘이다.

먼저 손기정은 당시로는 인간이 넘긴 힘든 마의 2시간 30분대를 돌파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독일 선수 우승으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온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히틀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메인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손기정의 우승을 축하했다.

하지만 정작 환희로 가득 찼어야 했을 손기정의 얼굴에는 오히려 슬픔이 가득했다. 이름은 손기정이 아닌 일본식 ‘손기테’,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생전에 “나는 오늘까지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남승룡(베를린 올림픽 3위) 군으로 인해 세 번 울었다. 조선 사람이면서도 조선인 행세를 못 해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컴컴한 방안에서 신문을 통해 보면서 가슴 아파 울었다”고 손기정의 우승을 평가했다.

2002년 11월에 타계한 손기정은 체육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하는 것으로 그가 생전에 남긴 업적을 기렸다. 또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 터가 있는 서울 만리동에는 넓이 2만9682㎡의 손기정체육공원이 조성돼 있다.

손기정만큼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도 당시로써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일본오픈 우승이자 골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골프 선수가 해외에서 거둔 첫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골프계는 물론 전체 스포츠계가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그래서였을까. 일본 골프사에서 ‘연덕춘’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는 연덕춘 대신 일본 이름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 德春)’, 국적도 일본으로 돼 있었다.

늦었지만 당연히 바로 잡아야 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와 대한골프협회(KGA)가 협력해 일본골프협회(JGA) 설득에 나섰다. 그 노력에 힘입어 JGA는 지난 4월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를 한국인 연덕춘으로 바로 잡았다. 딱 84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 12일 양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故 연덕춘, 역사와 전설을 복원하다’라는 행사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유실됐다가 복원된 우승 트로피도 전달됐다. 이 트로피는 향후 독립기념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다. 국가 간의 관계는 민간 영역인 스포츠가 더러는 큰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특히 한일 양국의 스포츠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활발한 교류를 펼쳐 양국의 선린관계 유지에 일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행사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연덕춘의 우승을 시작으로 골프가 양국 우호 증진에 기여한 바는 자못 크다. 많은 한국의 남녀프로 골퍼들이 지금도 일본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골프가 양국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텄다고 해도 결코 과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있다면 연덕춘의 신원 회복으로 중단된 한일 골프 대항전도 복원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년 용평버치힐컵 한일 남자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을 시작됐던 남자골프 한일전은 이후 6년간 중단됐다가 2010년부터 2012년에 밀리언야드컵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됐으나 2015년부터 중단된 상태다.

여자골프 한일전도 1999년에 처음 시작돼 2014년까지 지속됐다. 그 이후에는 4개 투어 대항전 형식으로 몇 년간 명맥을 유지하다 현재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진 상태다.

연덕춘은 생전에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1968년 KPGA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초대, 2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5년 5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연덕춘의 이름은 KPGA의 역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KPGA가 한 시즌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제정해 수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화려하지도 않고, 후대의 칭송도 미미했지만, 연덕춘이 척박한 한국 골프에 심은 씨앗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가 내디딘 걸음이 오늘날 세계 골프의 주류로 우뚝 선 한국 골프의 출발이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늦었지만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아울러 불꽃처럼 살다간 ‘골프 선구자’ 고 연덕춘의 골프 인생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