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목숨을 잃은 건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무렵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교회 강단을 지킨 목회자이자 예수님의 어린양, 소양(蘇羊)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했으나 장기간의 투옥과 고문으로 끝내 옥중에서 순교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제의 조상신 숭배 강요에 맞서 하나님 외의 그 어떤 우상 앞에도 절하지 않겠다는 신앙 정조와, 민족혼을 지킨 항거였다. 당시 한국교회의 다수가 신앙을 변절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주기철 목사는 신앙의 맥을 잇고자 목숨을 걸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민일보는 주기철 목사의 손자이자 주안장로교회 담임인 주승중 목사를 14일 서면으로 만났다. 그는 “광복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푸신 큰 은혜”라며 “이스라엘이 애굽 압제에서 해방된 것처럼,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주승중 목사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는 죽음도 불사한 강인한 신앙인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선친인 주영해(1927~90) 장로로부터 들은 가족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서 고문을 두려워하셨고 남겨진 가족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한 번은 가석방으로 집에 오셨다가 다시 잡혀가게 됐는데, 당시 8순의 어머니께 무릎 꿇고 ‘제가 변절할까 두렵습니다.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며 부둥켜안고 우셨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 있을 당시 “처음에는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와서 돌아보니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남겼다고 했다. 주승중 목사는 “그분이 7년 간의 환난을 이겨낸 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설명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 중심 목회’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신앙은 주승중 목사의 목회 철학에도 깊이 새겨졌다. 그는 “주기철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아낸 분”이라며 “목회자가 자기가 가르친 말씀에 먼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다”고 말했다. 또 목사 안수 직전 둘째 큰아버지(주영만 장로)에게서 들은 충고를 잊지 않고 있다. “목사가 위선자가 되지 말라. 네가 가르친 대로, 설교한 대로 네가 먼저 살아라. 이것이 할아버지가 보여준 본”이라는 말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로 자란 한국교회가 물량주의·교권주의에 흔들리고 있다”며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강단 대신 순교의 영성으로 십자가 복음을 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초대교회가 계급주의·사대주의 타파, 독립운동과 사회적 봉사로 신뢰를 얻었지만, 오늘날 교회는 공공성을 잃어 신뢰 하락과 쇠퇴를 맞았다는 게 주승중 목사의 진단이다. 그는 “주기철 목사님은 물질·지식을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며 “개인 구원은 교회·이웃·사회·민족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십자가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교의 영성으로 외쳐야 한다”며 “그럴 때 110여 년 전 민족의 고난 속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주승중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고난의 명상’을 인용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