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을 맞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이어가야 할까. 조국과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후손이 전하는 믿음의 유산을 들어본다. 독립운동가 최영돈(1897~1985) 선생의 손자 최상도 호남신학대 교수와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주기철(1897~1944) 목사의 손자 주승중 주안장로교회 목사를 만나 독립과 순교라는 두 헌신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유산을 조명했다.
지난 8일 햇볕은 뜨겁고 공기는 무거웠다.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에 들어서자 철문 너머로 붉은 벽돌 건물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투옥·심문·고문을 당했다. 역사관 앞에서 만난 최 교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가 직접 갇힌 곳은 아니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고통받았던 이 장소에서 최 교수의 마음은 복잡해 보였다.
“이곳에 올 때마다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이셨을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열 살이었는데 그때는 그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었어요.”
십자가 고난의 길과 독립운동
입구를 지나 좁은 복도를 걷는 동안 마치 오래전의 공기가 되살아오는 듯 숨이 가빠졌다. 벽에는 당시 수감자들의 사진과 기록이 걸려 있었고 습기 섞인 냄새가 그 시절의 차가운 공기를 전했다. 전시실 한쪽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패널 앞에서 최 교수가 발걸음을 멈췄다.
최 교수는 “전시된 것들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정말 외로운 길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대구 3·1운동을 이끌었던 김태련 선생님처럼 할아버지께는 혈연보다 더 진한 운명을 함께하는 동지가 계셨을 것이다. 굉장히 외로운 길을 가는 데 동지들과 함께한다는 양면적 감정이 끊임없이 있었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형무소 한가운데 자리한 옥사는 과거의 소리를 품고 있었다. 좁은 독방에 들어서자 한 사람의 삶을 가두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었고 숨을 쉬기조차 버거운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다.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희미했고 그 안에서 나눈 신앙과 결단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독립운동가 최영돈 선생은 1919년 경북 김천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지역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잔혹한 태형 90대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신앙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사명으로 여긴 그는 고문 후유증 속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돕고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비록 목회자가 되기 위해 입학했던 평양신학교를 중퇴했지만 그의 삶은 신앙과 민족애가 결합된 숭고한 헌신의 본보기로 남아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 고난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외로운 길을 가셨죠. 할아버지도 운명적 죽음, 잔혹하고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아셨을 텐데 그것을 포기 못 한 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었다고 봅니다.”
최영돈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임종 직전에야 손자들을 위해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사실을 알렸다.
“할아버지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셨어요. 당시 보수적 신앙으로는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다는 게 답답하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1925년 신학교 입학 기록이 있고, 1928~30년 재학 중이셨다가 김천 만세운동에 관여하신 후 돌아가지 않으셨죠.”
생명을 담보로 한 복음
최 교수는 할아버지의 선택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학교 교육보다는 현장에서의 복음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손자가 되어서야 목사가 된 것이죠.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신앙의 색깔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습니다. 자기 보신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생존을 넘어 생명을 향한 신앙이었어요.”
서대문형무소를 걸으며 최 교수가 강조한 것은 생명이었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서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존중입니다. 내 생명을 버릴지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죠. 할아버지는 고문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각오하고 하신 것입니다. 내 생명이 희생되더라도 동포가 살길을 여시려고 하셨어요.”
통일을 향한 미시적 접근
최 교수는 광복 8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과제로 분단 극복을 꼽았다. 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남달랐다. “북쪽 김정은도 통일을 포기하고 우리도 통일에 관심이 없어졌어요. 거시 담론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미시적으로 와닿게 이야기하는 게 실질적이라고 봅니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 중인 자녀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자녀들에게 ‘아시안 고속도로’가 연결되면 베이징에서 베트남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줍니다. 만두 먹고 쌀국수 먹으러 에든버러에서 차 타고 올 수 있다고요. 우리는 한반도에 살지만 섬처럼 살고 있어요. 하지만 대륙이거든요. 통일되면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끼리 경쟁하는 게 아니라 훨씬 확장된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그는 광복절을 단순히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신앙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결단을 새롭게 하는 날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길을 걸었던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면 그 결단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