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떡국을 끓이기 위해 모인 네 명의 청춘들. 하지만 이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다. 보육원에서 나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이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만들어낸 ‘조립식 가족’이다. 자립준비청년들(보호종료아동)의 애환을 그린 연극 ‘조립식가족’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지구인아트홀에서 막을 올렸다. 2021년 초연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 작품은 보육원 출신 당사자들이 직접 기획한 특별한 무대다.
떡국 한 그릇에 담긴 그들만의 설날
가족 없는 이들에게 명절은 더욱 쓸쓸하다. 보육원 퇴소 후 고군분투하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설날은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기다. 가족들이 모여 떡국을 나눠 먹는 그 시간, 혼자인 이들의 마음은 더욱 허전하다. 그래서일까. 보육원에서 태어나 혼자 살아온 정식은 “같이 설 음식을 만들어 먹자”고 간절히 조른다.
설날 오후 정식과 희정이 함께 동그랑땡을 만들고 있다. 늦게 일어난 정미가 그들이 만든 동그랑땡을 집어먹으며 어린 시절 설날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식이한테 들었을 거 아니에요. 저 그냥 갈 데 없어서 여기 있는 거예요.”
남편의 바람과 시댁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정식이네 집에 얹혀사는 정미의 솔직한 말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내 집 마련까지 성공한 정식이지만 어린 시절 형들에게 맞아 다리를 저는 그는 여전히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연극에서 정식이가 4살 연상의 보육원 선배이자 청년 사업가인 모세, 택배 물류 사원으로 일하는 희정, 그리고 정미까지 혈연관계도 아닌 이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아 새해를 맞는 모습에 관객들은 가족의 새로운 정의를 발견하게 된다. 상처와 분노, 아픔으로 점철된 이들의 대화 속에는 자립준비청년들의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풀었다.
“나도 세 번이나 이혼하고 네 번째 결혼하잖아”라며 정식에게 가족을 만들라고 잔소리하는 모세, “그렇지 뭐. 알고 보니 또 잡놈이지 뭐야”라며 연애에 계속 실패하는 희정의 모습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연극은 희망적인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갈등과 상처를 딛고 정식과 정미가 한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면서 두 명의 커플과 모세, 희정은 가족의 의미를 배운다. 혈연이 아닌 선택으로 맺어진 가족, 그것이 바로 조립식가족의 진짜 의미였다.
장례식에서 시작된 이야기
이 연극의 특별함은 자립준비청년 당사자가 직접 기획했다는 점이다. 한국고아사랑협회 이성남 회장은 최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협회는 보육원을 퇴소한 40대 당사자들이 만든 단체”라며 “우리는 아직도 보육원 퇴소 후의 삶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기억은 가난 그 자체보다 다름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상실감, 결핍의 기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작품이 탄생한 직접적인 계기는 한 보육원 후배의 죽음이었다. 대구에서 열심히 일하던 그 친구가 30대 후반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는 50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평소 조용한 친구였는데 장례식장에 50명이나 모인 거예요. 알고 보니 너무 외로워서 매일 50명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죠. 절반 이상이 그 친구의 전화를 받아줬어요. 그 친구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관계를 만들었을까 생각했죠. 죽은 친구가 우리를 모아준 역할을 한 것이에요. 그때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연극을 기획했다. 이 회장은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 모여 퍼즐을 이뤄 살아가는 것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엇보다 실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색했다. 어른들은 보육원 출신들의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사람들은 한 가지 카테고리로 집어넣는다”며 “이들을 잘 알아야 세분화된 지원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자립준비청년 출신은 아니지만 출연 배우들은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역할에 몰입했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연출을 맡은 김태영씨는 경북 김천 임마누엘 보육원을 직접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엄마’라고 불리는 보육사에게 그동안 키우고 떠나보낸 아이들이 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전했다. 오랜 침묵 후 들려온 대답 중 하나는 바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였다.
김씨는 “그 말은 공연팀 모두를 울리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며 “우리가 더 넓은 시선으로 다시 조립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가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해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모세역을 맡은 배우 허규씨는 “자립준비청년들의 삶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며 “용서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