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두 기본권 사이에서 입법부가 책임 있게 조율하라는 역사적 명령이었다. 당시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새로운 법을 제정하라는 유예기간까지 부여하며 입법자의 성찰과 균형을 촉구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그 명령은 무시당했고 약속은 헛된 메아리로 남았다. 국회는 입법 의무를 방기했고 정부는 입법의 공백을 수수방관해왔다. 입법의 책무를 ‘재량’으로 왜곡하고 생명권에 대한 고뇌는 ‘권리’라는 말장난 뒤에 감춰졌다.
국회, “입법 의지” 대신 “이념입법”으로
최근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이수진 의원이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사실상 임신 기간 전면 낙태 허용을 골자로 하며 국민의 혈세로 낙태 수술을 지원하겠다는 건강보험 급여화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법안에서 ‘낙태’는 ‘인공임신중지’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되고 태아의 생명권은 단 한 줄의 고려도 없이 삭제되었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주문한 생명권과 자기결정권 사이의 “헌법적 조율”이 아니라, 특정 이념에 기반을 둔 극단적 자기결정권의 입법화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보건의 양심적 진료 거부권마저 침해될 위기에 놓였다. 이것이 과연 헌법재판소가 기대한 “입법의 책임”인가. 아니다. 이것은 입법을 가장한 방기이며 권리를 가장한 생명경시다.
정부, 책임의 언어로 침묵을 포장하다
박주민 의원 주최의 국회 토론회에서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헌재의 입법 취지를 존중하며 국회의 입법재량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형법 개정 여부에 대해서도 “의원입법인지 정부 입법인지 논의 중”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6년이 지났고 수많은 공청회와 토론회가 있었으며 법무부와 복지부 산하 위원회가 몇 차례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아직도 “논의 중”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논의가 아니라 책임 있는 실행이다. 태아 생명의 권리는 공청회에서 찬반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지켜야 할 헌법적 원칙의 문제다. 생명권 없는 자기결정권은 독선이다. 우리는 여성의 고통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의 해답이 “낙태의 전면 허용”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낙태의 권리’가 아니라, ‘낙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막는 책임’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왜 미혼모들은 사회적 안전망 없이 병원 문을 나서야 하는가. 왜 위기 임신 여성들은 낙태 외에 다른 선택지를 제시받지 못하는가. 왜 수많은 태아는 이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정치권은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생명은 정치의 대상이 아니다. 태아는 투표권도 없고, 목소리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생명이다. 정치가, 법이, 권력이 외면한 그 생명의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며, 공동체의 양심이다.
우리는 묻는다. 입법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공백의 시간 동안 사라진 수많은 생명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방치된 법률은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결단을 촉구하며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생명을 지키는 방향으로 입법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사이의 헌법적 균형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정치는 침묵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외칠 것이다. 법은 공백일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외칠 것이다. 태아가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지금 생명을 위한 입법을 결단하라.
김길수 목사
<약력> △생명운동연합 대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 대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생명존중위원회 전문위원 △전북 복죽교회 시무목사
정리=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