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국립발레단은 유난히 바쁘다. 지난 5월 거장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 아시아 초연을 마친 국립발레단은 6월 또 다른 거장 안무가 이어리 킬리안의 컨템포러리 발레 3편을 모은 ‘킬리안 프로젝트’를 대구와 서울에서 공연한 뒤 7월 일본 도쿄에서 도쿄시티발레단과 한일 국교 정상화 기념공연으로 강효형 안무 창작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여름의 막바지인 8월에도 두 편의 공연을 잇따라 올린다. 오는 13~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 재연과 29~3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히스토리 오브 KNB 무브먼트 시리즈 3’ 공연이다.
드라마 발레 ‘인어공주’와 ‘카멜리아 레이디’는 지난 2014년 2월 취임해 12년째 국립발레단을 이끄는 강수진 단장 겸 예술감독이 오랫동안 공들인 끝에 지난해부터 연속으로 선보이고 있다. 두 작품은 명실공히 지난해와 올해 한국 발레계 최고의 화제작이다. 그런가 하면 강 단장이 취임 이듬해인 2015년 시작한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 시리즈’의 10주년을 맞아 호평 받았던 작품들을 모은 ‘히스토리 오브 KNB 무브먼트 시리즈 3’ 역시 국립발레단에게 의미 있는 공연이다.
“해외에서 한국 발레에 대한 관심 높고 러브콜 있지만…”
최근 국민일보와 만난 강 단장은 정기공연이 유난히 몰린 이번 여름 스케줄에 대해 묻자 “대체로 국립발레단의 상반기 일정이 6월 말, 늦어도 7월 초에는 끝난다. 하지만 올해는 대관 일정이 여름에 집중되는 바람에 몰리게 됐다”면서 “대관은 우리 발레단이 아니라 극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국립발레단이 전용극장(오페라하우스)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언젠가는 꼭 생겼으면 좋겠다”고 서두를 뗐다.
국립발레단은 1962년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출발했다. 다만 당시 발레는 한국무용과 함께 국립무용단에 포함됐으며, 국립발레단이 독립 단체가 된 것은 1973년부터다. 그리고 2000년 독립 재단법인으로 바뀐 이후 예술의전당 입주단체가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재단법인이 된 국립발레단은 자율성이 높아지고 재정규모도 전속 단체 시절보다 몇 배 커졌다. 덕분에 러시아 거장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를 초빙해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스파르타쿠스’ ‘라 바야데르’ 등 기본 레퍼토리를 확충하는 등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전용극장이 없다보니 단원 연습 등 효율적인 조직 운영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해외 발레계와의 교류 및 창작 발레 개발 등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최근 해외에서 한국 발레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국립발레단도 여러 곳에서 초청받고 있습니다. 작품은 물론 안무가나 무용수의 교환 요청도 오고요. 하지만 전용극장이 없다보니 국제 교류가 쉽지 않다는 점이 늘 아쉽습니다.”
2014년 단장 취임해 12년째 국립발레단 이끌어
강 단장은 대중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스타 발레리나 출신이다. 한국 발레계의 해외 진출 1세대를 대표하는 그는 모나코 로열발레학교 졸업 후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해 1997년 수석무용수 승급 및 1999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종신단원이었지만 2014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립발레단장 제안을 받고 귀국한 그는 3년 임기의 단장을 4연임 중이다. 국내에서 국립예술단체장 임기제가 도입된 이후 4연임은 그가 처음이다.
“단장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임성남 초대 단장님을 비롯해 전임 국립발레단 단장님들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주는 책임감이 크니까요. 단장이라면 자신이 재직하는 동안 발레단의 성장이 멈추면 안되잖아요.”
강 단장은 취임 첫해부터 기존의 레퍼토리에 더해 연간 유명 안무가들의 작품 1~2편을 국내 초연했다.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 존 테틀리의 ‘봄의 제전’, 존 크랑코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이 한국 관객과 만났다. 유명 안무가의 작품을 가져오려면 저작권을 보유한 재단 등의 허가를 받아 실제로 공연을 올리기까지 국제 관행상 3~4년 정도가 걸리며, 3년 단위로 공연권 계약이 갱신된다. 강 단장의 경우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30년간 활약하며 구축한 네트워킹을 토대로 단시간에 공연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발레 팬들이 오랫동안 보고싶어하던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와 ‘카멜리아 레이디’가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소개되며 정점을 찍은 모습이다.
강효형, 송정빈 등 안무에 재능 있는 단원 발굴 및 육성
“노이마이어는 자신의 작품을 요청한 발레단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공연권을 잘 주지 않습니다. 국립발레단도 기존의 레퍼토리 면면과 단원들의 기량을 확인한 뒤에야 협업이 이뤄졌는데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 아쉽지만, ‘인어공주’와 ‘카멜리아 레이디’를 통해 단원들이 성장하고 관객들이 감동받는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근래 국립발레단 후원회를 활성화한 강 단장은 후원금으로 연습실 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해외에서 객원 발레마스터들을 연간 3~4명씩 부르고 있다. 홀리오 보카(전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수석무용수), 야닉 보캥(전 베를린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등은 단원들의 기량 향상에 적지 않게 도움을 줬다.
여기에 국립발레단이 2015년 신설한 안무가 양성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 시리즈’도 강 단장이 전임 단장들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바로 단원들이 안무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현재 전 세계 메이저 발레단들은 대부분 안무가 양성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이번 ‘히스토리 오브 KNB 무브먼트 시리즈 3’에는 그동안 강효형, 송정빈, 이영철, 박슬기 등 단원들이 안무해 호평받았던 소품들을 한번에 볼 수 있다.
“한국 발레는 그동안 뛰어난 무용수들을 많이 빠르게 배출한 데 비해 안무가를 키워내는 시스템이 미비했습니다. 제가 슈투트가르트에서 경험한 것처럼 국립발레단에서도 무용수들이 자신의 동료들과 작업하며 안무가로 성장하길 바랐습니다. 안무를 시작한 단원들 가운데 소품에서 재능을 보인 강효형과 송정빈에게 각각 전막발레 ‘허난설헌-허난설헌’과 ‘해적’을 만들게 했는데요. 국립발레단 레퍼토리가 된 두 작품은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많습니다.”
“국립예술단체장 미리 뽑되 전문가 선정 위원회 구성해야”
최근 문체부는 국립발레단 등 국립예술단체장을 공개 모집으로 선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또 단체장 후보자의 역량을 공개적으로 검증하고, 전임 단체장 임기만료 1년 전부터 선발 절차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강 단장은 “내 경험으로 볼 때 발레단 예술감독에겐 5년 정도의 시간은 줘야 일관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도 해외 발레단처럼 최소 1년 전에 현재 단장의 유임 또는 새로운 단장의 내정이 정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단장 선발의 경우 해외 발레단처럼 전문가들로 구성한 위원회를 꾸려서 뽑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그가 발레계에서 프로 무용수를 거쳐 예술감독으로 활동한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그동안 달려오기만 했다. 내 자신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늘 느끼면서도 성격상 앞에 놓인 일을 우선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면서 “내가 원래 쉴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물론 나도 힘들 때가 있지만, 내게 쉰다는 의미는 뭔가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국립발레단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