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화된 종교 [문화 비평]

입력 2025-08-06 21:00 수정 2025-08-06 21:13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로 잘 알려진 페트라 코스타 감독과 제작사(Busca Vida Filmes)는 ‘현대 브라질 민주주의의 운명’이라는 주제를 계속해 탐구하는 듯하다. ‘열대의 묵시록’은 브라질 복음주의권의 정치 세력화에 초점을 맞춰 정치·문화적 전쟁이 벌어지는 브라질 사회를 비춘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자인 ‘킹메이커’ 실라스 말라파이아 목사가 이번 작품의 화면에 오래 머무는 이유는 그가 브라질 복음주의 교회 부흥의 상징적 인물이자 교회의 정치 참여론의 기수이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복음주의의 정의는 차이가 있다. 브라질 복음주의 교회는 개신교 오순절 교단 계통을 의미한다. 부흥회와 철야 기도회를 특징으로 한다. 열렬한 기도와 찬양 집회는 이들의 성정에 맞는 형식이다. 그 세는 지난 50여 년간 무섭게 불어났다.

실라스 말라파이아 목사는 전형적으로 ‘종교의 카리스마를 빌려 대중의 직관적 감정을 조직하는 전략’(에른스트 블로흐)을 활용해 아류를 양산한다. 그가 빈번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비난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런 신좌파적 전략이 오늘날 브라질 사회의 식자층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 내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인기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말라파이아 목사가 이 문화전쟁에서 내세우는 개념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반동성애, 낙태 금지, 반공 등이다. 그는 모든 진보 운동을 ‘문화 마르크스주의’라고 비난하며 단순하고 선명한 전선을 구축한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사한 현상을 우리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목격하고 있어 이를 가히 세계적 현상이라 부를 만하다. ‘영적 전쟁’의 역사는 멀리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근래의 ‘테러와의 전쟁’까지 끊이지 않았다. 그 모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강조되고 대중의 열광이 뒤따른다. 이슬람, 공산주의, 일루미나티, 북한, 중국 등 적의 이름이 계속 바뀌고, 전쟁을 도모한 세력은 현실적 이득을 챙기거나 획득에 실패한다. 이 기획의 배경에는 신정론적 사상과 종말론적 감수성이 자리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세속적 성공이 제1 가치로 작동하며, 근래 번영 신학에서 영적인 것은 실상 가장 물질적인 것이 된다.

지난 브라질 대선에서 복음주의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모두 보우소나루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룰라 지지자도 있었고, 룰라 또한 지난 2022년 대선 유세 막판에 자신의 신념을 어기고 교회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공통으로 ‘죄’를 말하는데 정작 그 개념은 제각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1960년과 1974년 두 차례 브라질을 방문해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었던 빌리 그래함 역시 강조했던 그 ‘죄’는 아무튼 죄 사함과 축복에의 열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한다. 1960~70년대 남미에서 태동해 확산한 해방신학은 남미 역사의 질곡과 현실의 참상을 직면해 ‘가난한 자들의 복음’과 ‘역사 안의 구원’을 강조했다. 그러다 1984년 교황청 발 비판 성명으로 사제들에 재갈이 물린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내세’를 강조할수록 대개 현세에 집착하고, ‘역사’를 강조할수록 대개 현실에 초연해진다는 것이다.

코스타 감독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는 깊어 보이지 않는다. 우매한 대중이 종교적 환상에 빠져 있으며 그것을 종교 정치 지도자가 이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 현실을 타개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룰라 대통령은 의외로 대중의 종교 인식에 대해 적절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복음주의로 개종하는 이유를 묻는 감독에게 룰라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한 노동자가 실직해서 노조에 가면 노조는 계속 이렇게 말해요. ‘동지, 공장 안에서 조직을 갖추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조직화하면 파업도 하고 싸움도 하고 시위도 해야 할 겁니다. 자본주의니 뭐니 때문이에요.’ 그러면 그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젠장, 난 실직해서 방금 여기 왔는데. 저자가 혁명을 일으키라네.’ 그렇게 그 사람은 노동자당을 떠나 가톨릭교회로 가요. 교회에선 또 이럽니다. ‘그래, 아들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 땅에서 고난을 겪어야 해. 인생은 그런 거야.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란다.’ 그 남자가 말해요. ‘젠장, 실직했다고 말하려고 왔는데 저 사람은….’ 그러다 그는 번영 신학을 접해요. 두 표현이 있죠. ‘문제는 악마이고 해답은 예수님이다. 아주 간단해’ ‘악마가 당신 삶에 들어왔기에 당신은 실직했지. 예수님이 출구야. 예수님이 당신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그 사람은 위안을 얻지요. 저는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하게 된 원인은 종교를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브라질의 유명한 보사노바 뮤지션인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의 노래 ‘행복’(A Felicidade)엔 “가난한 자의 행복은 카니발의 거대한 환상과도 같다”라는 구절이 있다. 브라질 사회의 주요 이벤트인 카니발은 사회통합 역할 문맹 정책이냐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러시아의 문예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유럽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카니발적 문화’를 분석하며 공식적 위계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일시적이나마 수평적인 공동체적 인간관계를 실현하는 해방의 장으로 그것을 판단하는데, 초월적 영혼 중심의 중세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반동으로 신체성의 해방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견해는 “상징적 해방이자 일시적인 긴장 완화일 뿐…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의 일탈일 수 있다.”(테리 이글턴 ‘미학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비판에 직면하고, 나아가 카니발이 ‘체제 유지의 안전판 역할’을 할 뿐이라는 반론에 부딪힌다.

카니발의 나라 브라질에서 종교는 어떤 문제 해결의 길도 제시하지 못하고 현실의 이권 다툼의 한복판에서 때론 카니발처럼 때론 아편처럼 소모되는 역할을 계속하는 것인가. 근본적 해결이 요원한 상황에서 카니발적 해방감은 내칠 수 없는 가치가 되기도 하고 단지 완급의 조절을 필요로 하는 유예 공간이기도 하다.

바흐친을 학자로서 존경하면서도 그의 카니발론의 한계를 지적했던 고전학자 세르게이 아베린체프는 ‘카니발의 웃음이 두려움을 없애고 도그마를 부수기에는 역부족’이라 한 바 있다. 그 해체와 전복의 자리에 초월적 차원의 부재를 채울 시야와 지혜를 인간은 종교로부터 여전히 염원하고 있다. 개신교 일부가 세계 도처에서 오늘날 인류의 자산이라 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은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그 파괴의 현실 일부를 다큐멘터리 ‘열대의 묵시록’은 현장에서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


구본일(브라질 상파울루 주재 외무공무원)

<약력> △러시아 모스크바대 문학박사(19세기 러시아문학 전공) △외교부 근무 중 △‘도스토옙스키 고백록’(을유문화사)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