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이미 신학을 전공하리라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곧장 신학교로 향하지는 않았다. 내가 경험했던 교회 속 하나님 이야기는 내 귀에 너무 가볍고, 때로는 천박하게까지 들렸다.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말하는 하나님은 속 빈 껍질처럼 공허했다.
누가 알려줬는지 아니면 스스로 깨달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나는 사람을 아는 꼭 그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문학의 세계를 배우기로 했다. 나 자신의 마음을 읽는 법과 타인의 삶을 느끼는 법을 익히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라 믿었다.
만약 이때 저자인 김기석 목사님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지혜의 언어들’ 속에서 그는 전도서라는 고대의 지혜를 오늘의 현장으로 불러내 사람과 하나님을 함께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어린 내가 찾아다니던 신학의 모습이었다.
책은 고대의 목소리와 현대의 감수성 사이에 섬세히 다리를 놓는다. 시간의 강 위에 놓인 투명한 다리처럼. 한쪽 끝에는 3000년 전 예루살렘의 지혜자 코헬렛이, 다른 쪽에는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현대인이 서 있다. 물론 이 다리 놓기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고대의 본래 의도가 현대인의 언어 속에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위험을 감수한다. 고대의 지혜와 오늘의 삶이 서로의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전도서를 유쾌하다고 보는 시선이다. 이는 결코 얄팍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삶의 유한함과 부서짐을 깊이 응시한 끝에 비로소 피어나는 웃음이다. 고통이 없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했기에 웃을 수 있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끝에 향기로운 꽃을 피우듯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고통스럽게 인정한 자만이 터뜨릴 수 있는 웃음이다. 이런 웃음은 책상 앞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의 바람에 몸을 거세게 부딪쳐 본 사람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코헬렛의 말에서 그는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겸손한 깨달음을 끌어낸다. 우리는 때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인식은 절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나 저자의 언어를 거치면 오히려 자유로움이 된다.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 말이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건 전도서의 현재적 기쁨에 대한 강조다.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낙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코헬렛의 시선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것을 권한다. 이는 영원 앞에 선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로운 현재 긍정이다.
전도서는 이 헛된 세상에 시선을 돌리지 말고 저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정한 신앙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삶의 모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힘을 기른다.
코헬렛의 지혜를 저자의 목소리로 다시 들으면 이렇다. “삶은 한 줌의 안개이지만 그 안개 속을 걸으며 햇빛을 느끼는 기쁨을 잊지 말라.” 삶의 무게를 견디면서도 그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는 게 지혜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라는 메시지가 책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겸손의 신학이자, 동시에 희망의 신학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어린 시절 가졌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전도서와 전도서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선 원어 실력이나 방대한 주석 지식보다 사람과 삶을 깊이 이해하는 감각이 먼저 필요하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다. 인간적 성숙 없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송민원 더바이블 프로젝트 대표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