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다.”
한모(30)씨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5년째 간병해 온 아버지가 향후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해야 할지, 숨이 남아있는 한 그 생명을 끝까지 붙잡는 게 맞는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돌봄의 부담을 경험한 가족이기에 경제적 문제 등 현실적 고민도 컸다. 한씨는 6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간병인을 붙이면 한 달에 300만원이 드는데 부모님까지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정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노인 인구 비율 18%를 넘긴 초고령사회, 66세 이상 고령층 빈곤율 39.8%. 급격한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수치다. 고령화와 나이 듦이 그 자체로 암울한 미래로 여겨지면서 소극적인 생명 선택인 연명치료 중단을 넘어 보다 적극적인 안락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특히 고령사회 돌봄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들 사이에선 해외 일부 국가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조력자살 등까지 현실적 선택지로 언급되는 추세다.
말기 암에 걸린 종군기자가 안락사를 택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더 룸 넥스트 도어’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최근 방영 중인 MBC 드라마 메리 킬즈 피플은 조력 사망 장면을 첫 회부터 보여주는 등 각종 문화 콘텐츠 속에서도 안락사가 자연스럽게 다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기독 청년들의 고민은 더욱 크다. 죽음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부양의 무게에선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스위스에서 안락사 기계를 통해 생을 마감한 한국인의 사례를 언론을 통해 접했다는 김민서(24)씨는 “병든 가족을 돌보다 결국 해체된 가정을 본 적이 있어 그 마음이 이해됐다”면서 “반대로 부모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자식으로선 방법이 없어 막막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지현(25)씨도 “결혼과 취업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고령층 돌봄까지 짐처럼 얹어지는 구조는 청년들에게 버겁다”고 했다.
기독 청년들은 이런 고민 속에서 생명 존중의 가치를 지켜낼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기독청년단체 오리진스콜라와 라이프워커는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 필름포럼에서 75세 이상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고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린 일본 영화 ‘플랜 75’ 상영회를 열었다. 경제적 가치가 너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안락사가 하나의 인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에서 기독 청년으로서의 고민을 나누는 자리었다. 상영회를 주최한 최다솔 라이프워커 대표는 “노인 보호를 인권으로 보는 주장과 안락사를 인권으로 보는 시각이 충돌하는 시대적 모순을 청년들과 함께 성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배진우(26)씨는 “영화를 보고 안락사가 경제적 이유로 선택된다면 경제활동이 어려워진 노인을 죽음으로 몰 수 있기에 국내 도입 문제도 신중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대학생 이연웅(22)씨는 “성경은 ‘늙은 자에게 지혜가 있다’고 말하는데 노인을 부양 대상으로만 느끼는 혐오를 넘어 공경과 존중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안락사 논의를 놓고 모순적 갈등에 놓이게 된 원인엔 돌봄과 고령화의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된 사회 상황이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원칙을 명확히 하고 안락사 이슈를 윤리적 찬반 구도가 아닌 돌봄 체계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석환 장로회신학대 기독윤리학 교수는 “죽을 권리를 논하기에 앞서,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며 “복지시스템의 미비나 돌봄의 공백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며, 교회와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진단했다.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생명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주권을 지키는 데 있지만, 논의는 찬반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서 “연명치료 중단처럼 불가항력적 상황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 수용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기독교인은 끝까지 생명을 지키고 돌보는 고민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사회는 개인이 극단의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