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마을에 찾아온 3일의 기적

입력 2025-08-06 09:32 수정 2025-08-06 09:35
필리핀 마닐라 바세코의 해안가.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차로 30분이면 닿는 곳, 주필리핀 미국 대사관과 마닐라 5성급 호텔이 늘어선 도심에선 10분 만에 가는 곳. 마닐라 항구 끝자락엔 인구 10만이 넘는 작은 해안 마을이 있다.

우리나라 여의도 6분의 1 크기인 이 마을은 마닐라 도심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형형색색의 항만 컨테이너에 가려져 있기 때문. 성벽처럼 둘러선 컨테이너 뒤편에 ‘바세코’가 숨겨져 있다.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가 수십 년간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오각형 매립지의 또 다른 이름은 ‘쓰레기 마을’ ‘세계 3대 빈민가’다.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 우측에선 바닷물이 파도를 치며 가라앉은 쓰레기 더미를 토해내고 있고, 주민들이 딛고 사는 콘크리트 바닥 틈새에선 쓰레기 썩은내가 뿜어져 나온다. 밤이 되면 마을 일대 해안가에서 마약밀매 성매매 인신매매가 벌어진다.

바세코에서 바라본 마닐라 시내. 육지는 보이지 않고 컨테이너와 고층 건물들만 솟아 있다. 마닐라 시내에선 바세코가 보이지 않는다.

마닐라 시내에서 바세코로 들어가는 길. 해안가엔 백사장 대신 쓰레기 더미가 펼쳐져 있다.

지난 2일, 이 척박한 땅에 대한기독여자의사회(회장 정미라) 단기의료선교팀이 발을 내디뎠다.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사비로 성수기 항공료를 끊은 30여명의 의료진. 이들이 넉 달간 의약품과 선교를 준비하면서 곱씹은 선교 철학은 다음과 같았다. “더 높은 위치가 아니라 같은 눈높이로 진료하기” “문화 차이는 가르쳐야 할 내용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체험할 기회로 삼기” “약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녀오기.”

토요일 새벽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 의료진은 마닐라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바세코로 향했다. 이어 한나절간 진땀을 흘리며 비어 있던 학교 건물을 내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비뇨기과는 물론 수액치료실 초음파검사실 혈액검사실을 갖춘 임시 종합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약국엔 고혈압 항히스타민 호흡기 해열제 고지혈증 당뇨 등 각종 의약품이 준비됐다.

진료는 3일 주일예배를 드린 뒤 정오부터 곧바로 시작됐다. 진료실에서 현관으로 이어진 바세코 주민들의 줄은 현관에서 건물 밖까지 금세 이어졌다. 의료진은 쉬는 시간도 없이 5분마다 한 명을 진료했고, 전기 공급이 열악해 정전이 나면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진료를 이어갔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내과 의료진이 5일 필리핀 바세코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이 5일 필리핀 바세코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내과 의료진이 5일 필리핀 바세코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치료가 시급한 중증환자들이 가장 먼저 의료진을 찾았다. “3주째 배가 아파서 왔다”던 마리나(11)군. 초등학생 나이에도 몸무게가 50㎏에 달한 그의 배는 축구공을 집어넣은 듯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초음파 화면을 보니 마리나군의 장벽은 정상 크기보다 3배 불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 진단에도 마리나군의 어머니는 “병원비가 없다. 아이는 곧 괜찮아질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나군은 수액을 맞고 약을 처방받은 뒤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료실엔 만성질환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당뇨 환자 안지씨(49) 차례가 됐을 때 혈당 측정기 화면엔 ‘측정 불가’가 깜빡였다. 안지씨의 입술과 혀는 극심한 탈수 상태로 바짝 말라 있었다. 병리검사실에서 재확인한 그의 혈당 수치는 800mg/dL(정상 수치의 약 8배). “생활이 어려워 당뇨약을 끊었다”는 그에게 의료진은 인슐린 주사와 수액을 투여한 뒤 “내일 꼭 다시 와서 경과를 보자”고 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산부인과 의료진이 5일 초음파 화면을 보며 필리핀 바세코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딸이에요. 아기는 아주 건강해요. 머리 모양도 너무 예쁘네요.” 현장에선 감격스러운 대화도 오갔다. 산부인과 진료실을 찾은 라모스(29)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임신 8개월 만에 받은 초음파 검사. 네 번째 출산을 앞뒀지만 초음파 검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화면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출산 전에 성별을 알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이렇게 먼 곳까지 한국 의사 선생님들이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라모스씨는 “바세코에선 병원에서 출산하는 산모가 10명 중 1명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의료진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초음파 화면을 찍어 사진을 선물했다.

사흘간 1047명을 진료했지만 의료진의 마음은 홀가분하지만은 않다. 일주일에서 한 달치 약까진 주더라도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 일부 의료기기와 의약품도 간호사인 현지 선교사에게 맡기고 가지만, 10만명 넘는 바세코 주민들을 모두 치료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정미라 대한기독여자의사회 회장

정미라 회장은 “우리는 이곳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긴커녕 평생 먹을 약도 주지 못한다”면서도 “인생을 돌아보면 따뜻했던 잠깐의 기억이 삶의 긴 터널을 돌파할 힘이 되는 것 같다. 우린 잠깐 발붙였다가 떠나지만, 이번 의료선교가 바세코 주민들께 희망으로 이어지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는 1948년 캐나다 의사 플로렌스 머레이 선교사가 세운 단체다. 정 회장은 “한국 선교에 일생을 바친 머레이 선교사님을 비롯해 조선 땅에서 죽기까지 헌신한 의료 선교사들에 비하면 우리 사역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우린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과 시간을 주님의 일에 사용할 뿐이다.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지 않고 의료선교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회원들이 5일 사흘 간의 의료선교를 마친 뒤 현지 스태프와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닐라=글·사진 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