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아지가 어디가 아파!” 손녀 수아(최유리)가 이상해졌다는 아들 정환(조정석)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할머니 밤순. 좀비로 변해버린 수아를 먹이고 씻기며 누구보다 살뜰히 돌본다. 하지만 수아가 그르렁거리며 달려들 때는 가차 없다. 효자손으로 머리를 쿵 내리치며 단호히 말한다.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할미한테.”
영화 ‘좀비딸’의 사랑스러운 할머니 밤순을 연기한 배우 이정은(55)은 원작 웹툰을 옮긴 듯한 싱크로율을 보여줬다는 말에 “원작처럼 체구가 작은 할머니였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면서도 “특수분장을 했는데 표현이 잘 된 것 같다”고 흡족해 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내 얼굴이 동그래서 머리를 까면 귀엽단 말을 듣는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의 문광도 그랬다”며 웃었다.
할머니 역할이 낯설지 않다. 이정은은 뮤지컬 ‘빨래’에서 할머니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했었다. ‘빨래’를 인상 깊게 본 필감성 감독이 그 기억을 떠올려 ‘좀비딸’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정은은 실제 열 살 차이인 조정석의 엄마 역이 부담스러웠다면서도 “나문희·김수미 선생님도 내 나이 때 할머니 역을 하지 않았나. 이 나이여서 ‘힙한’ 할머니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밤순의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위해 이정은은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5명에게 사투리 대사 녹취를 받아 반복해서 들으며 연습했다. 제주도 말씨인 ‘우리들의 블루스’(tvN·2022)의 정은희, 경상도 사투리를 쓴 ‘미스터 션샤인’(tvN·2018)의 함안댁을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캐릭터 소화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그는 “촬영이 끝나면 번아웃이 올 정도”라고 돌이켰다.
“사투리 연기는 리얼함이 기본인데 아무리 연습해도 도달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그 지역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데 왜 안 될까’ 자책하며 괴로워한 적이 많아요. 지금은 생각을 바꿨어요.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과정의 즐거움을 찾기로 했죠. 그러면 배우로서 더 많은 걸 경험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저 스스로 덜 지치는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과거엔 자신이 작품을 위해 얼만큼 노력했는지 “뻘쭘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그는 이 역시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결과를 보는 분들은 천부적 재능이려니 생각하겠지만 어떤 배우도 타고 나지 않는다. 그만큼 노력하는 것”이라며 “예전에는 괜히 티 내는 것 같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배우에 대한 이해가 커지시리란 생각이 든다”고 얘기했다.
이정은은 수많은 출연작 중 대표작을 꼽아 달라는 말에 ‘기생충’과 ‘미스터션샤인’을 언급했다.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 올려준 작품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요한 건 현재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 ‘좀비딸’을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과거(작품)는 지나간 전 남자친구 같은 거 아니겠나”라며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좀비딸’은 이정은에게 또 한 편의 대표작으로 기록될 듯하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는 폭발적 흥행세를 과시하고 있다. 첫날 관객 43만명을 동원하며 올해 개봉작 중 최고이자 역대 코미디 영화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 이어 4일 만에 누적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고 6일 만인 4일 200만명을 넘어섰다. 올해 가장 빠른 흥행 기록으로 천만 영화인 ‘서울의 봄’과 동일한 속도다.
무대를 떠나 매체 연기를 본격 시작한 이래 10여년간 쉼 없이 달려 온 이정은은 이제 조금씩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JTBC)을 함께한 김혜자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내가 즐기면서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을 하라고요. 배우로서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선택해 나가려 합니다. 지금 저 자신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