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 교수의 기독교 문화비평] 일본의 대재난 예언 헤프닝, 재난 예언의 올바른 성경적 의미 찾기

입력 2025-08-04 13:50

지난달 5일 새벽 적지않은 수의 한국, 중국, 그리고 대만 시민들이 불안한 심정으로 일본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전 4시 18분을 기점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대재난”이 일본과 주변국을 덮칠 것이라는 예언이 몇 달 동안 일본 전역에 회자된 까닭이었다. 다행히 4시 18분을 기점으로 일본과 동중국해 주변 지역에는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을 비롯한 어떠한 대규모 재난도 발생하지 않았다. 거의 대다수의 예언들이 그러하듯 이번 예언 역시 허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번 해프닝에서 주목할 사실은 오히려 일본 국내보다 주변국에서 대재난 예언에 대한 반향이 상대적으로 더 컸다는 점이다. 왜 당사자도 아닌 일본의 주변국이 이번 대재난 예언에 불안감을 느꼈던 것일까. 일단 이번 예언이 지난 2011년 3월 발생한 일본의 동일본 대지진 발발시기를 맞춘 인물이 내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예언가의 정체는 일본의 은퇴 만화가이자 사이비 종교인인 타츠키 료(たつき諒)다. 그녀는 1999년 ‘내가 본 미래’(私が見た未来)라는 만화책에 젊은 시절부터 꿈속에서 본 여러 미래 사건들을 그려 놓았다. 원래 이 책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만화가의 은퇴기념 단편집이라 출간 당시에는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2021년 일본의 한 예능프로에서 이 책을 재조명하면서 이 작품이 일본인들의 전국민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이 작품의 표지에 “대재해는 2011년 3월”(大災害は2011年3月)이라는 문구가 작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1년 3월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이어진 쓰나미로 도호쿠 지역에서 약 25,000여 명이 사망했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대규모 재해의 발생시기를 12년 전 출판된 도서에 명백하게 표기해 두었으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추가적으로 2025년 7월 중 2011년 재해보다 몇 배는 더 큰 대재난이 일본 관서지역과 동중국해 주변지역(대만과 필리핀)에 발생할 것이라는 예지몽 내용을 담아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예언의 효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부 독자들은 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11년 재난 때와 달리 2025년의 예지몽은 아무 효력이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해프닝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 가볍지 않다. 실상 이번 예언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일반 시민들과 종교계 인사들 모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등과 관련된 일본 신종교인들의 예고가 수도 없이 회자된 적 있는 데다가 대지진 위험은 일본인들의 삶의 상수 같은 조건이라서 관련된 예언이 그들의 마음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한국인들이 북한 핵미사일과 전쟁개시 위협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북핵 위기도 대개 한국의 주변국과 미국 시민들이 더 크게 걱정하지 막상 당사자인 한국인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보통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한다.

어쨌든 이번 예언 해프닝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언의 참 의미를 되짚어볼 계기로 삼기에 적절하다. 예언이란 원시종교와 고등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교에서 초월적 권능의 대표사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원시종교와 고등종교를 나누는 결정적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초월적 힘을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씨족, 혹은 민족의 구원과 번영을 위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인류와 만물 전반에 이르는 구원 사역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는지 여부다. 전자는 낮은 수준의 보편적 도덕의식을 반영하는 반면 후자는 높은 수준의 보편적 도덕성을 추구한다.

국지적인 재난에 대한 예언은 말 그대로 특정 개인과 가족 혹은 민족 단위의 생존에 관한 사안을 다루고 있기에 주로 원시종교적 특성을 반영한다. 이런 류의 예언이 한 사회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종교성이 아직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일수록 근원적인 보편적 도덕의식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좁은 범위의 인맥에 속해 있는 가족과 친지만 친교와 보호와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할 뿐 넓은 차원의 종교적 인류애나 인권의식을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5일 일본 관서지역과 동중국해에 대재난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일본의 사이비 종교인 타츠키 료의 1999년 작품, '내가 본 미래'

이번 대재난 예언 사태에서 일본사회 전반은 물론이거니와 불교, 기독교 등 일본의 고등종교 공동체들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일부 일본 기독교인들은 일본 내 대다수 신종교인 혹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내놓는 예언들의 영적 근거 문제를 거론하며 이러한 유형의 예언이 모두 ‘마귀의 궤계’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일본 내 기독교인, 특히 개신교인 수는 총 40만명 수준(일본 전체 인구의 약 0.4%)으로 그 수가 매우 적은 것이 사실이나 그들이 이번 예언 사태에 대처하는 태도는 일본교회의 신학적 성숙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기독교계는 자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재난을 섣불리 계시록의 각종 재난들과 연결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거시적인 종말론적 섭리 속에서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눅 21:11)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의 유효성은 인정하나 개개의 재난 사태를 구약적 심판과 형벌의 관점으로 바라보지는 않으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기독교계는 재난과 그것을 예고하는 예언에 대해 상대적으로 한국교회보다 진일보된 신학적 이해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만큼 일본 기독교계가 지속적으로 지진과 쓰나미, 화산폭발 같은 대형 재난상황 속에서 교회의 적절한 역할과 신학적 상황인식을 두고 고민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우리 한반도는 일본이나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다른 여러 나라와 달리 지진이나 화산활동과 관련된 대규모 재난을 겪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기독교계는 주변국의 대규모 재난을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심판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시각을 유지했고 재난 관련 예언에 대해서도 쉽게 혹하고 쉽게 요동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35년의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인지 일본을 둘러싼 재난예고나 실제 재난상황을 두고 국가신토 우상숭배와 제국주의 전쟁범죄의 ‘업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주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 최대규모 개신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발언해 한일 양국에서 구설수에 오른 적 있다. 유독 일본 관련 재난예고나 뉴스에 대해 우리 한국사회는 기독교계 내외부를 막론하고 ‘일본이라면 재해를 당할만하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일본 우익의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정치관이나 주변국과의 왜곡된 관계인식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지만 일본인 전체를 싸잡아 전범 혹은 전범 후계자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은 비복음적이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유대인 외에도 헬라인과 로마인에 대한 차별없는 전도에 일생을 바쳤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헬라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기간 약 170년(주전 332-164년)에 걸쳐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압제자였다. 로마인들 역시 주전 63년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 지역 점령에 성공한 후 약 100년 넘게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압제자였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대해 갖는 분한 감정보다 당시 유대인들이 헬라인과 로마인에게 가졌던 감정이 몇 배는 더 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을 기록한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 가운데 헬라인과 로마인의 압제에 대한 정치적, 민족주의적 악감정에 지배된 채 삶을 살아간 이들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헬라인, 로마인을 비롯한 주변 이민족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들어보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복음전파에 온 힘을 쏟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믿음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 인물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의 백부장이었다. 이 성경 일화를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상황에 대비해보자면 가장 큰 믿음을 갖고 있다고 인정받은 이는 압제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파견된 일제 군관이었던 셈이다.

이번 일본 대재난 예언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일본인들이 아니라 대부분 한국과 중국, 대만, 홍콩 시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적지않은 수는 이 시기 일본 관광계획마저 취소할 정도로 대재난 예언에 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 문화적, 정서적으로 깊게 밀착되어있는 대만은 차치하더라도 한국, 중국, 홍콩 시민들 입장에서 이번 7월 5일 대지진 예언은 전범국이자 우상숭배국인 일본이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 예고로 인식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자. 만약 일본 내에 복음을 받아들인 이가 적고 원시종교인 신토의 우상들을 섬기는 이가 많아서 일본 내 대재난에 대한 예언을 수긍할만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한반도 역시 일본인들과 비슷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은 전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이고 대한민국 내 교회들은 순전한 믿음을 잃고 그 교세가 점점 쇠퇴하고 있는 중이다. 작금의 상황을 봤을 때 한반도라 해서 우상숭배의 죄과로부터 크게 자유로운 지역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하기 어렵다. 교회 신자면서도 무속, 점, 운세, 타로에 의존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고, 꼭 이방신을 믿는 것은 아니라 해도 교회 내부에서 권력과 물신(物神)을 섬기는 교역자나 신자들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교회가 과연 일본의 재난 예언을 ‘반면교사’ 삼자고 할 만큼 일본 사회나 기독교계보다 도덕성이나 순전한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번 일본 대재난 예언 사태를 통해 한국교회는 재난 예언에 대한 두 가지 신학적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한다. 첫째, 재난 예언의 원시종교적 해석을 금해야 한다. 특정 집단에 국한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나 심판의 뜻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완수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의 뜻 안에서 성경 속 예언의 의미들을 되새겨야 한다. 재난과 관련된 예언 역시 국지적, 미시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 종말을 유념한 거시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예언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금해야 한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실현하던 전범들과 지도층 인사 모두가 망령이 된 상황에서 아직까지 일본에 일어나는 대규모 재해를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해석하는 시각은 민족적 구원(舊怨)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적, 비복음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박욱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좁은문은혜교회 목사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