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못간 15살 소녀가 만든 키링…지진 속 되찾은 웃음 [아살세]

입력 2025-08-01 00:01 수정 2025-08-01 11:38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일하는 지역 청소년 15살인 잉진과 18살인 이이카인이 환하게 웃고 있다. 비라이트 제공

독특하고 감각적인 패턴에 정성스러운 바느질로 마무리된 키링. 서울 성수나 홍대 ‘힙플’ 소품 가게에 내놓아도 좋을 만한 이 수공예 소품을 한 땀 한 땀 만든 이들은 미얀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는 10대 소녀들이었다. 12년간 국내 패션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을 살려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인 미얀마에서 핸드메이드 공방을 연 한국인 선교사와 함께였다. 평신도 선교사로 미얀마 아마라푸라에서 3년째 활동하는 조에(선교사명·46)는 31일 마포구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아이들의 자립을 돕는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이 친구들이 저를 성장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이 재봉틀 교육을 받으면서 키링 등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그들이 만든 키링 제품.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수공예품 공방. 비라이트 제공

‘비라이트’라는 이름의 조에 선교사의 공방이 있는 곳은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차로 8시간 떨어져 있다. 전통 원단 시장이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베틀로 옷감을 짜듯, 130개가 넘는 소수 민족의 전통의상을 위한 고유 패턴 원단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조에 선교사는 현지 아이들에게 지역 자원을 활용해 수공예품을 제작하는 실력을 갖춰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2022년 9월 이곳에 정착하며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인도와 미얀마 양곤에서 각각 1년과 2년간 선교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홀로 공방을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광객이 꽤 많던 지역이었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바뀌었고, 쿠데타나 내전으로 외부인 발길이 더 끊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3월 말 인근 만달레이에서 최대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다. 공방 문을 연 지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낮 1시쯤으로 기억해요. 공방에서 친구들과 일을 하던 중이었는데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너무 놀라서 함께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렇게 큰 지진인 줄 몰랐던 거예요. 그런 줄 알았다면 밖으로 나갔을 거예요.”

절체절명의 순간, 조에 선교사의 마음엔 미안함이 밀려왔다. 학교를 졸업해도 일할 곳이 없어 등교를 포기한 아이들이 하루빨리 자립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공방 일이 때론 부담으로 다가왔고, 그런 조바심에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엔 선교사는 그날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함께 맞잡은 손에서 느낀 온기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수공예품 공방이 지난 3월 지진 피해를 입은 모습. 비라이트 제공

공방 직원은 지역 청소년이다. 15살인 잉진과 18살인 이이카인. 잉진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원단 시장에서 커다란 원단의 양쪽을 박음질하며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했던 아이였다. 또 다른 직원인 이이카인은 부모가 없이 조에 선교사를 파송한 기독교 전문인 선교단체의 또 다른 선교사와 함께 지내던 학생이었다. 평소 뜨개질을 좋아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직원이 됐다.
공방 직원인 15살인 잉진과 18살인 이이카인. 비라이트 제공

청소년인 공방 직원이 지난 3월 강진 피해 복구 후원자에게 선물할 키링을 제작하고 있다. 비라이트 제공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르쳐야 했다. 옷 디자인을 하던 자신도 에코백이나 파우치 등 소품 디자인은 처음이었기에 맨땅에 헤딩하듯 제품을 개발하고, 원단 시장에서 천을 고르고, 시제품을 만들어봐야 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직원 월급이 밀린 적이 없었다. 미얀마 청소년·청년 자립 취지에 공감한 선교사와 단기 선교팀이 기념품으로 구매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에 선교사는 “후원금 없이 제품 판매 수익으로 월급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역의 큰 지진은 공방에 여러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좋은 일을 하겠다고 시작한 것인데 정작 함께 일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선한 모습을 보이는지 의구심이 생기더라”고 말하는 조에 선교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지진 발생 다음 날 연락이 닿지 않은 직원 잉진의 집에 찾아갔었다. “지금까지 뭐가 이렇게 바빴는지 그 친구 집에 가볼 생각을 제가 미처 못했더라고요. 듣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열악한 곳에서 지내고 있더라고요.”
지난 3월 강진 피해로 갈라진 공방 내 벽을 보수하는 모습. 비라이트 제공

지난 3월 강진 피해로 갈라진 공방 내 벽을 보수하는 모습. 비라이트 제공

지난 3월 강진 피해로 공방 내 벽이 갈라져 급하게 보수한 모습. 비라이트 제공

지진 발생 일주일 전 공방을 방문한 구호단체 ‘기아대책’과의 인연도 마찬가지였다. “딱 일주일 만에 기아대책팀이 지진 긴급 지원을 하러 이 지역에 다시 오셨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재난 피해 복구 후원자들에게 드릴 기념품을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우편으로도 받을 수 있는 작은 제품을 함께 고민하면서 키링을 만들게 됐어요. 저희 공방의 첫 대량 생산이기도 했고요.”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선교단체 관련 업무 등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그는 기아대책의 제작 요청을 처음엔 고사했다. 그러나 지진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본 공방을 수리하고, 더 많은 아이들을 고용해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다. 급하게 미얀마로 돌아가 두 친구와 함께 후원자 기념품을 제작했다. 이대영 기아대책 미얀마 지부장은 “자신의 재능을 살린 방식으로 현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를 우려하던 선교사님에게 응원할 수 있음에 저 또한 감사했다”고 했다.

조에 선교사는 8월 둘째 주 미얀마로 돌아간다. 한국에서의 평범한 삶을 내려놓고, 외딴 나라로 떠난 언니를 걱정하는 동생을 뒤로한 채 큰 균열이 생긴 공방을 고치고, 더 많은 직원을 뽑아 제품 제작 기술을 전수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직원들이 안정적이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현지에 팔릴만한 제품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도 더 깊게 하려고 한다고 했다.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있는 수공예품 공방 비라이트가 인근 도심에서 제품을 선보이고 있는 모습.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미얀마 아마라푸라에 한국인 선교사가 2024년 5월 시작한 공방에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다양한 수공예 제품들. 미얀마 소수 민족의 고유 패턴을 활용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비라이트 제공

청소년인 공방 직원이 지난 3월 강진 피해 복구 후원자에게 선물할 키링을 제작하고 있다. 비라이트 제공

“‘belight’ 공방의 이름처럼,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빛나길 항상 기도해요. 직원들에게 공방 이름이 적힌 예쁜 앞치마를 입히는 이유도 아이들이 하는 일에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거든요.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