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었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심청이는 효에, 심봉사는 자기 연민에, 뺑덕어멈은 탐욕에 눈이 멀었죠. 우리 모두 어딘가에 눈이 먼 존재 아닐까요?”
국립창극단이 30일 국립극장에서 리허설 일부를 공개한 신작 ‘심청’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요나 김은 “판소리 ‘심청가’는 유교의 효와 권선징악을 담고 있지만, 이번 작품은 그 이면에 내재된 사람들의 맹목(盲目)을 들여다보는 여정”이라고 밝혔다.
국립창극단이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공동제작하는 ‘심청’은 단원을 포함해 157명이 출연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8월 13~14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전당과 9월 3~6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심청’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의 협업으로 지난해 프로젝트 발표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유럽에서 지난 20여 년간 30편 넘는 오페라를 연출하고 6편의 현대 오페라 대본을 쓴 그는 2017년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의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된 바 있다.
요나 김은 이번 작품을 ‘판소리 시어터’로 정의했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한국의 판소리를 음악 장르로 인식하는 데다 보편적인 ‘극’(시어터)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보일 공연은 판소리 ‘심청가’를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스타일로 재해석한 형태다. 레지테아터는 원작의 배경과 캐릭터 등을 자유롭게 변형해 서사를 새롭게 창작하는 연출 방식이다. 그는 “레지테아터는 고전을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해서 관객들에게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의 경우 전통 판소리 ‘심청가’의 주요 눈대목이 나오지만 캐릭터의 성격이나 주제가 완전히 바뀐다. 원작에서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효녀다. 게다가 그 희생은 용왕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 왕비가 되는 한편 아버지의 개안으로 보답받는다. 하지만 요나 김은 “이번 작품에서 심청이 연꽃 타고 살아나거나 왕과 로맨스를 나누는 장면은 없다. 원전의 결말은 어린 소녀를 희생시킨 뒤 죄책감과 불편함을 잊기 위한 판타지”라면서 “현재 여러 버전의 결말을 놓고 고민 중이다. 확실한 것은 심청이 (용왕이나 왕 같은) 남성의 권력에 기대어 행복을 찾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서 심청 역에는 김우정과 김율희, 심봉사 역에는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노파 심청 역에 김미진, 뺑덕어멈 역은 이소연 등이 각각 캐스팅됐다. 김율희는 “원전 속 심청이는 모든 것을 감내하는 착하기만 한 1차원적 캐릭터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왜 심청이 죽어야만 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말했고, 김우정은 “심청이는 모든 여성의 이야기인 것 같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소녀가 이번에 어떻게 바뀌는지가 작품의 재미”라고 말했다.
효녀로만 묘사되지 않는 심청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심봉사에 대한 해석이다. 원작 판소리에서 심봉사는 아이처럼 순수한 ‘딸바보’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실수를 반복하며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요나 김은 심봉사를 “우리 모두의 표상으로서 가장 공감 가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심봉사 역의 김준수는 “심봉사가 극 중에서 개안을 한 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을 것 같다. 나도 이번 작품을 하면서 판소리 ‘심청가’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고, 유태평양은 “심봉사야말로 딸을 죽음으로 내몬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며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