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땀과 페인트로 얼룩진 붉은 조끼 너머로 학생들의 서툰 화음이 포개졌다. 지난 25일, 캄보디아 농촌 지역에 있는 구세군 캄폿 영문(교회) 강단에 선 14명의 고등학생들이 봉사활동 마무리를 앞두고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찬송가 ‘은혜’를 합창하고 있었다.
처음 해외봉사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 채플 학교에서의 예배시간에 대해 “간식 때문에 갔다”고 말하던 학생도, 이번 봉사를 자신의 이력서에 추가할 값진 경력으로 여기는 이도 있었다. 고된 노동과 낯선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보낸 시간 끝에, 이들의 아름다운 합창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캄보디아 아이들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학생들을 하나로 이어줬다.
지난 20일부터 26일까지 구세군 한국군국(사령관 김병윤) ‘드림해피 10기’ 해외봉사단원으로 캄보디아를 찾은 이들은 인천 인평자동차고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비기독교인인 이들은 캄폿영문 교회의 낡은 담벼락을 보수하고, 개교 이래 처음으로 트마이 초등학교의 운동회를 열어주는 등 나눔을 실천했다. 학생들은 국민일보와 이번 해외봉사 처음과 끝에서 두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낯선 땅에서의 약 일주일이 각자에게 어떤 선물이 있었는지 따라가 봤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성취’를 발견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성공에서 ‘성취감’을 얻어온 학생들은 캄보디아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배웠다. 1학년 전교 부회장인 박한올(17)군에게 가장 큰 성취는 선거 당선이었지만, 그는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기쁨이 선거 당선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처음 해외에 나와본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주재진(17)군은 낯선 아이들과 몸짓으로 소통하며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다고 말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어온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던 여태영(18)군도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 속에서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소심했다던 그는 먼저 다가와 웃어주는 아이들 덕에 용기를 얻어 “긍정적인 성격을 한국에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다짐했다.
어릴 적 천식에 시달렸던 이한별(18)군은 특공무술을 단련하는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흘리는 건강한 땀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한국에서의 운동과 달리, 이곳에서의 봉사가 짜여져 있지만 자유롭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착한 호구(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라 불릴 만큼 정이 많던 김정우(17)군은 지난 24일 트마이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를 잊지 못한다. 그에게 아이가 다가와 “I’m so happy(정말 행복해요)”라고 속삭였다. 그는 “내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 큰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봉사하러 왔지만 오히려 받은 아이들
‘주러 왔다’고 생각했던 학생들은, 조건 없는 마음을 돌려받는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을 배웠다. 트마이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날엔 하루 종일 땀 흘리는 한 학생에게 캄보디아 여학생이 다가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산 작은 사탕 하나를 쥐여주기도 했다.
스스로를 “남들과 다른,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돈겸(17)군은 이곳에서 다른 기술을 배워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아이들과의 교감 속에서 느낀 ‘따뜻함’이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던 오은준(17)군의 시야는 이번 캄보디아에서의 봉사를 계기로 세계를 향했다. 그는 “한국을 넘어 더 넓은 곳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강태웅(18)군은 학교 채플에서 배운 책임감을 실천하러 왔다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한국에서 투정 부리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며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겉은 툴툴거리지만 속은 깊다는 황승재(18)군은 현지 봉사자들과의 축구 경기에서 8대 4로 대패했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함께 뛰는 것만으로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며 웃었다.
봉사 경험이 전무했던 고호(17)군은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며 ‘주는 기쁨’에 처음 눈떴다. 그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받아줘서 너무 감동받았다. 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구나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소년들, 마음속에 품은 ‘믿음’
학생들은 길고도 짧았던 일주일을 뒤로하고 다시 인천국제공항을 밟았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믿음이 자라 있었다. ‘스펙’을 위해 참여했다며 누구보다 세속적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던 김요셉(18)군의 변화는 조용하지만 단단했다. 그는 “돌아보니 신앙이 가장 확실하게 남았다”며 고된 노동과 아이들과의 순수한 교감을 통해 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말했던 백지율(17)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마지막 날 부른 찬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믿음이 55%까지 와닿았다”고 표현하며, 동정심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염려에 한 아이의 삶을 꾸준히 응원하는 ‘후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작업반장 에이스’를 자처했던 박윤배(17)군도 “나중에 돈을 벌면 후원하겠다”던 처음 생각과 달리,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시작하고 싶다”며 후원을 결심했다.
동화 ‘아기돼지삼형제’의 벽돌집을 짓고 싶어서 캄보디아에 온 안희수(17)군은 고백했다. 그는 “처음엔 행복을 주러 왔는데 아이들이 이미 너무 행복해 보여 줄 게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더 큰 행복을 받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래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제 마음속에 들어오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캄폿(캄보디아)=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