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쏟아지는 비에 진흙탕으로 변한 운동장 위로 팽팽한 밧줄 하나가 놓였다. 따가운 햇볕 아래 밧줄을 사이에 두고 캄보디아 초등학생 30여명과 한국에서 온 고등학생들 10여명이 뒤엉켜 힘을쓰고 넘어지며 함성을 질렀다. 23일 캄보디아 캄폿주의 쓰라에 찌어 트마이 초등학교에서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열린 운동회의 한 장면이다. 568명의 아이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단체 경기의 열기에 흠뻑 빠져들면서 마을 축제가 열렸다.
아이들과 함께 땀 흘린 이들은 인천 인평자동차고등학교에서 온 14명의 남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구세군 ‘드림해피 10기’ 해외봉사단원으로 참여했다. 학생들은 ‘쓰라에 찌어 트마이’ 초등학교의 첫 운동회를 열어줬고, 구세군 한국군국(사령관 김병윤)이 현대해상의 후원으로 설치한 새 개수대를 학교 측에 기증하는 자리도 함께 마련했다.
첫 운동회, 흙탕물 속에서 터져 나온 568명의 함성
줄다리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환호성을 지르며 각자 흩어져 천막 부스로 달려갔다. 운동장 곳곳에서는 새로운 게임들이 동시에 펼쳐졌다. 자루에 두 발을 넣고 깡충거리며 뛰는 경주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엉켜 넘어지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컵에 물을 담아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옮기는 경기가 열렸고, 얼굴에 물을 뒤집어쓴 아이의 모습에 지켜보던 친구들 사이에서 큰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하루 종일 땀 흘리는 한국 봉사단원에게, 한 어린 여학생이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산 작은 사탕 하나를 건네기도 했다. 여태영(17)군은 “에어컨은커녕 조명도 제대로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너무나 밝게 생활하는 모습을 봤다”며 “그 순수함을 보며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운동회의 대미는 학생들이 준비한 K팝 댄스와 태권무 공연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마음의 거리를 좁힌 아이들은, 이제 스스럼없이 무대 앞에 모여 앉아 한국 형들이 선보이는 화려한 몸짓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자 한 남자아이가 인평고 학생들에게 다가와 서툰 영어로 “정말 행복했다(I’m so happy)”고 속삭였다고 한다.
이날 보여준 학생들의 헌신은 낯선 땅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구세군이 설립한 인평자동차고등학교에 다니며, 대부분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학생들은 채플에서 ‘섬김’과 ‘나눔’의 의미를 익숙하게 들어왔다. 강태웅(17)군은 “믿음은 아직 없지만, 좋은 말씀들을 들으며 책임감을 갖고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봉사에 참여한 이유를 전했다. 이날 아침 초등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봉사단원들이 함께 드린 기도는,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이들만의 다짐이었다.
“교실 5개 부족, 2교대 수업”… 캄폿 농촌 학교의 현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학교의 이름은 ‘쓰라에 찌어 트마이’. 크메르어로 ‘쌀농사가 새롭게 잘 되었다’는 뜻을 품은, 캄폿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름이 담고 있는 풍요의 소망과는 달리, 학교의 현실은 척박했다. 낡은 목재 책걸상들이 놓인 교실은 더운 날씨에도 선풍기 하나 없었고, 빛바랜 시멘트 벽과 허름한 시설들은 수십 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학교는 낡고 오래된 건물 두 동 뿐이었다. 1976년, 전 국민의 4분의 1이 학살당한 ‘킬링필드’의 참상이 끝나가던 시기에, 배움을 갈망하던 마을 주민들이 직접 힘을 합쳐 첫 건물이 세워졌다. 다른 하나는 1996년 훈센 총리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 두 건물로 568명의 학생을 모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인논 교장은 “교실이 최소 5개는 더 필요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한 반에 45명씩 학생들을 채우고 오전, 오후 2교대 수업을 강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 개수대와 568개 도시락, 마을 전체가 들썩인 나눔
운동회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환호하며 길게 줄을 섰다. 저마다의 손에 들린 에코백 안에는 공책과 연필, 과자, 그리고 가족과 함께 나눌 도시락이 담겼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웃 마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동장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오후, 학교의 오랜 숙원이었던 새 개수대 완공식이 교장 등 학교 관계자들과 봉사단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인논 교장은 “이전에는 아이들이 땀을 흘리고도 씻을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이제 위생적인 환경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선물을 받아 든 한 아이는 “친절한 한국 형들이 꼭 다시 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현지 봉사자를 통해 전했다. 행사를 마친 인평고 김정우(16)군은 땀으로 젖은 얼굴로 “작은 나눔이지만 큰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캄폿(캄보디아)=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