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김대중이 쓴 망명 일기

입력 2025-07-22 16:38
미국 방문 중 1971년 2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 한길사 제공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당 활동 중단, 국회 해산 등의 조치를 발표한 날이다. 헌법의 효력이 정지됐고, 박정희 정권은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당시 일본에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며 “지금 본국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놀라고 분노하고 상심하고 있을까”라고 덧붙였다.

‘김대중 망명일기’ 표지.

22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에는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김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이 수록됐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 일기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인 이희호 여사가 2019년 별세한 이후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동교동 자택에서 여섯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대부분 한자로 쓰인 일기에는 고어(古語)가 많고 일본식 한자 표현도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판독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힘을 모았다. 책은 그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2년 10월 17일에 직접 쓴 일기. 한길사 제공

책에는 죽음을 각오한 결기로 자신의 운명과 삶에 맞섰던 한 인간의 치열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 당시 급박했던 국내외 정세도 생생하게 담겼다. 망명을 선택하고 고독한 반유신 투쟁에 나선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일기에 상세히 적었다. 또한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가의 고뇌도 숨기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본국에서 고생하는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1973년 1월 19일)고 적기도 했다.

이날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홍걸 이사장은 “잘못했으면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운 좋게 발견해서 책이 나왔다”면서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 묻히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명림 김대중도서관 관장은 “유신 체제에서 겪었던 개인의 고통은 물론 한국 민주주의 쟁취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