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매립지 위로 돌아온, 한국 구세군 첫 캄보디아 사관

입력 2025-07-22 13:23 수정 2025-07-22 13:36
소완 메따 사관이 21일 캄보디아 프놈펜 영문에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캄보디아 프놈펜 스텅미언체이의 한 빈민가. 한때 도시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곳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깡통과 빈병 등을 주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을 터전이다. 이곳에서 끼니를 놓친 아이들이 좁은 골목을 서성이던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앞서 한 교회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한 작은 택시)을 놀이기구 삼아 뛰어다니면서 ‘까르르’ 소리 지어 웃고 있었다. 13년 전 한국 구세군이 세운 프놈펜 영문(교회)은 지친 이웃들이 잠시 시름을 잊고, 아이들이 마음 편히 머무는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프놈펜 스텅미언체이 빈민가에 위치한 구세군 프놈펜 영문의 모습. 13년 전 한국 구세군이 세운 이곳은 지역 사회의 사랑방이자 가장 약한 이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7년 역사의 한국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외국인 사관, 소완 메따(34) 부담임사관이 이 안식처를 지키고 있다. 메따 사관은 21일 프놈펜 영문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하나님을 만나기 전 나는 이곳의 고달픈 삶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며 “이젠 청소년기에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좌절하는 10대 여성 소년공들 꿈이 없는 청년들을 섬기고, 기독교 선교에 소외받았던 어르신들에게도 다가가려고 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들을 위해 간호사였던 경험을 살려 ‘진료소’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임신한 여성 소년공의 눈물’에 속만 타들어갔다

메따 사관이 처음부터 이웃의 아픔을 내 일처럼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 병원에서 3교대 간호사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엔 한국어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일상에 치여 살았다. 큰딸로서 부모님을 부양해야 했던 그에게 구세군 교회 출석은 현실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솔직히 처음 교회에 나온 건 한국어 실력을 늘리고 유학의 기회를 잡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또 한번 마음을 정하면 흔들리지 않는 캄보디아 ‘군인 정신’이 익숙한 메따 사관에게 구세군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프놈펜 스텅미언체이 빈만가 아이들이 21일 프놈펜 영문 마당의 툭툭을 놀이기구 삼아 장난을 치고 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세군의 문을 드나들던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은 한 소녀와의 만남이었다. 학교 대신 공장으로 내몰린 10대 여성 소년공들을 돌보던 간호사 시절이었다. 그는 “의무실에서 만난 열여섯 살 소녀가 ‘선생님, 4개월째 생리가 없어요’라며 울먹이며 저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당시를 전했다. 그러면서 “‘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막막한 마음에 남자친구와 상의해 결혼하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아이는 얼마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며 “그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무력감이 제 마음에 깊은 부채감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가 간호사로 일하며 마주한, 비슷한 처지의 어린 소녀들은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소녀의 비극을 넘어, 꿈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의 현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 청년 50명 중에 자기 목적을 아는 친구는 10명도 채 안 된다”면서 “나머지는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거나 사회 분위기를 따라 공부할 뿐, 자기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잊었던 기도’와 ‘무거운 어깨’ 사이에서

자신을 위한 꿈이 이웃을 위한 사명으로 무거워질 무렵, “구세군 사관이 되겠느냐”는 제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메따 사관은 “사관의 책임이 감당하기 힘든 짐처럼 느껴졌고, 제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가족 부양의 책임과 고된 현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던 그를 이끈 것은 잊고 있던 자신의 기도였다. 그는 “2018년 마지막 날, 청년 수련회에서 ‘어떤 과정으로든 한국에 유학 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편지를 쓴 뒤 완전히 잊고 있었다”며 “3년 뒤 주일학교 교사를 하겠느냐는 제안이 왔을때, 잊었던 그 기도가 떠오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깨닫고 사관학교로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20일 한국구세군 임관임명식에서 첫 외국인 사관으로 임명받은 소완 메따 신임 사관이 검지를 들어 올리는 구세군 특유의 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구세군 제공

한국 구세군사관학교 창립 117년 이래 첫 외국인 사관 후보생으로서 떠난 한국에서의 훈련은 그 무게만큼이나 고된 시간이었다. 6개월 만에 포기할 생각까지 했던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훈련 과정의 일환으로 잠시 방문했던 고향 캄보디아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캄보디아에 다시 와보니, 제가 포기하면 다음 캄보디아 학생들의 길이 막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단순히 저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내가 아끼는 청년들 앞에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 같아 그 책임감이 저를 끝까지 붙들었다”고 말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불교신자 부모도 축복

사관이 되기로 한 그의 결심은 95%가 불교도인 캄보디아에서 독실한 불교 신자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메따 사관은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쁜 사람이 되면 엄마는 얼마든지 저를 나무라셔도 괜찮다. 그런데 만약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까지 도울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없는 거잖지 않나’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며 “제가 눈물로 기도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제 길을 축복해주셨다”고 전했다.

소완 메따 사관이 스텅미언체이의 한 가정을 방문해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구세군 제공

13년 전 한국 구세군이 캄보디아에 처음 뿌린 ‘주는 사역’의 씨앗은, 이제 생존을 고민하던 한 인간을 ‘스스로 일어서는 리더’로 키워냈다. 왕립 프놈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자 군 간호사였던 그에게는 캄보디아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길이 있었다. 한국에 가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길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따라 기꺼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메따 사관은 “한국에는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이 많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었다”며 “이곳에서는 저보다 더 어렵고 약한 사람들의 손을 직접 잡아줄 수 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저의 진짜 기쁨”이라고 말했다.

프놈펜=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