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선교사, 나는?… 여선교사 우울증 남편의 2배

입력 2025-07-21 16:19 수정 2025-07-21 20:05
게티이미지뱅크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어요. 말할 사람도, 기대 쉴 곳도 없었죠.”

남아메리카에서 40년째 사역 중인 김명숙(가명·66) 선교사는 2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남편만 믿고 지구 반대편까지 왔지만 불화가 길었다”며 “언어 장벽에 갇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현지인들과는 소통이 어려웠다. 예배의 은혜마저 멀어졌다”고 말했다.

여성 선교사들의 정서적 위기가 통계로 확인됐다. 국민일보가 단독 입수한 ‘해외 한인 선교사 위기와 돌봄에 관한 실태조사’ 결과, 우울과 무기력 증상을 호소한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미국 LA 미성대(AEU) 박사과정 학생들이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의 지도를 받아 지난 4월 진행한 조사엔 22개국 한인 선교사 132명이 응답했다.

정신 건강 항목 가운데 여성 선교사들의 ‘무기력’ 경험 응답률은 38.3%로 파악됐다. 이어 불안·염려(34.0%) 수면장애(34.0%) 우울·조울(23.4%) 대인기피(21.3%)가 뒤를 이었는데, 모두 남성보다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그래픽 참조)
선교지 장기 체류 지원 만족도 역시 성별 차이가 뚜렷했다. 남성은 51.7%가 만족한다고 답했지만 여성은 22.2%에 그쳤다. ‘관계 회복’에 대한 지원 만족도 역시 여성(4.5%)이 남성(31%)보다 크게 낮았다.

그래픽=강소연. 게티이미지뱅크

이번 조사에선 기혼 여성 선교사의 경험이 주로 반영됐다. 조사 응답자 가운데 10명 중 9명(92.4%) 이상이 기혼자였다. 주목할 점은 적지 않은 여성들이 선교지에서 독립적인 ‘선교사’로 인정받기보다 ‘사모님’으로 불리는 현실이 이번 조사 결과에 반영됐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역의 주체가 아닌 조력자로 위치 지어지는 구조적 문제는 여성 선교사들의 사역 지속성을 약화하는 핵심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선교사 멤버케어와 역량 개발을 지원하는 단체 하트스트림의 엄은정 대표는 “한국에서 사모로 살다 파송과 동시에 ‘선교사’로 불리며 정체성 혼선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정체성 혼란은 정서적 위기로 이어지고, 특히 자녀 양육 부담이 여성에게 집중되면서 ‘이게 정말 선교가 맞나’ 하는 회의가 밀려온다”고 설명했다. 김미경 PCK여성선교사회 회장은 “여성이 선교 활동을 보고하거나 선교사 회장 직분으로 참석했을 때도, 외부 인사들은 오히려 남편을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여성은 선교사보단 사모라는, 메인 사역자보단 보조자라는 인식이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여성 선교사들의 경험담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2008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사역 중인 김지선(51) 선교사는 “남편의 비전을 따라 선교지에 왔지만 내 역할은 불분명했다”며 “아이들 등하교만 챙기다 하루가 끝났고 선교지 정착기엔 선교사라는 정체성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우울증이 와도 그게 뭔지 몰랐고, 참는 게 미덕인 줄만 알았다”고 털어놨다.

정서적 고립감도 여성 선교사들을 어렵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인도네시아의 신수연(45) 선교사는 “어려움을 나눌 사람이 남편 외엔 없었다”며 “현지인과는 거리를 둬야 했고 한인 동료도 드물었다.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신 선교사는 “서로를 동등한 동역자로 인정하며 각자 사역한 것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선교지의 치안 환경도 부담이다. 같은 지역의 윤명희(65) 선교사는 “밖에 나가려면 여성 선교사에겐 큰 결심과 준비가 필요하다”며 “답답한 일이 생겨도 집 안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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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사멤버케어네트워크(KMCN) 대표 최형근 서울신대 교수는 “타문화권에 들어가는 순간 선교사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급격히 올라간다”며 “이때 부부가 서로를 돌보고 건강하게 소통하는 능력이 사역 지속성의 핵심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파송 전 훈련조차 부족한 경우가 많고, 남편이 된다는 것, 아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선교는 부부가 동반자 관계로 하나님의 형상을 함께 드러내는 여정이어야 한다”며 “여성 사역자가 조력자에 머무르지 않고 본인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역을 주도할 수 있도록 파송 전부터 동등한 주체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여성 선교사들이 더 솔직하게 응답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로는 전체 선교사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수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조사 책임자인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는 “여성 선교사의 문제를 개인 역량 부족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며 “가족 정체성 훈련, 정서·의료 지원, 고령 부모 돌봄 제도화 등 구조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손동준 이현성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