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1일 오스트리아 빈 도나우강 인공섬에서 열린 유럽 최대 규모의 무료 야외 축제 ‘도나우인젤페스’(Donauinselfest). 올해는 6월 20~22일 약 20개의 무대에 200여 명의 아티스트가 출연했다. 축제의 일환으로 주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 주최한 프로그램의 주요 아티스트로 한국의 뮤지컬배우이자 크로스오버 가수 카이가 참가했다. 카이는 한국 창작뮤지컬 ‘벤허’부터 영미권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레미제라블’, 독일어권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요 넘버들을 각각 한국어, 영어, 독일어 소화해 관객의 환호를 자아냈다.
카이는 이 공연을 소화한 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뮤지컬 ‘팬텀’(~8월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다섯 번째 시즌이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 시즌은 현재 버전으로는 마지막이어서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다. 지난 5월 31일 개막한 이 공연은 6월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전체 장르 통틀어 월간 예매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카이에겐 ‘팬텀’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특별하다. 뮤지컬배우로서 첫 타이틀롤을 맡은 데다 10년 동안 5번의 시즌 가운데 네 시즌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 작품이 10년 동안 다섯 번이나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입니다. ‘팬텀’에 대한 관객들의 사랑 덕분이죠. 제 경우 5번의 시즌 가운데 4번을 함께한 만큼 애정이 깊죠. 특히나 이 작품은 제가 뮤지컬배우로서 첫 타이틀롤을 맡았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릅니다.”
‘팬텀’은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토대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19세기 프랑스 파리 오페라극장을 배경으로 천재적 재능을 가졌지만 흉측한 얼굴 탓에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에릭(팬텀)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크리스틴의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대본은 아서 코핏, 음악과 가사는 모리 예스톤이 담당했다. ‘팬텀’은 같은 원작 소설을 토대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할 때 이야기의 중심이 팬텀에게 맞춰져 있다.
카이는 서울대 성악과 출신으로 2008년 크로스오버 가수로 데뷔했다. 2009년 소프라노 조수미의 전국 투어에 함께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2011년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시작으로 뮤지컬배우로서 활동하기로 시작했다. 이후 뮤지컬 ‘드라큘라’의 조나단, ‘마리 앙투아네트’의 페르젠 등 서브 남주(여주인공 좋아하는 조연 남자 캐릭터)로 무대에 선 그는 2015년 ‘팬텀’에서 처음으로 타이틀롤(제목과 같은 이름의 등장인물로 주역을 의미)을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 말 뮤지컬 ‘몬테 크리스토’에 출연하느라 ‘팬텀’의 재연에 빠진 것을 제외하면 이번 시즌까지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저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팬텀’은 큰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의 묘미와 감동을 알게 한 첫 작품이기도 하고, 캐릭터 역시 오랫동안 성악도로서 노력해온 부분이 성악가 크리스틴을 가르치는 팬텀과 통하는 바가 많아서 편하게 무대에 올랐거든요. 지난 10년간 2~3년만마다 ‘팬텀’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배우로서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첫 무대가 지금도 어제처럼 생각나요.”
에릭 요한슨이 연출한 ‘팬텀’은 초연부터 완성도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번 5번째 시즌은 앞선 시즌과 비교할 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으로 무대가 대폭 커진 데 따른 동선 조정과 함께 일부 장면 단순화를 통해 몰입감을 높였다. 그는 “‘팬텀’은 10주년이 되었지만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그만큼 요한슨의 연출이 완성형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면서 “다만 프로덕션을 거듭하면서 배우의 성장과 함께 캐릭터의 묘사가 조금씩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배우의 경험과 연륜이 캐릭터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는 요한슨 연출가가 에릭에 대해 크리스틴을 좀 더 감싸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도 이번에 내 목소리를 줄이면서 크리스틴과의 연기적 조합을 더 신경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극 중 팬텀은 흉측한 얼굴 때문에 지하에 혼자 살면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진다. 카이는 팬텀이 타인에게 내면을 감추기 위해 자신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감이 가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기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 속 잘못된 생각이나 비틀어진 마음 등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니까요. 특히 직업상 역할에 따라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는 배우는 더더욱 팬텀에 공감하게 됩니다.”
팬텀이 워낙 애착이 가는 역할인 만큼 그는 이번 뮤지컬 ‘팬텀’ 공연이 마지막 시즌이라는 것에 누구보다 아쉬움이 크다. 물론 이번 프로덕션은 마지막이지만, 언젠가 같은 작품을 다르게 만든 새로운 프로덕션이 나올 수 있다.
“‘이번이 끝이 아니야. 또 올 거야. 나는 60세, 70세까지도 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야”라며 저 자신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팬텀은 아직 보내고 싶지 않은 역할이거든요. ‘조만간 다시 만나’라며 인사하고 싶어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