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연루 의혹으로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오랜 인연이 있는 엡스타인 사건 처리 문제를 두고 강성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이 반발하는 데다, 관련 보도를 한 보수 언론과는 대형 소송전까지 벌이게 됐다.
트럼프는 19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나는 법무부에 엡스타인과 관련된 모든 대배심 증언을 법원 승인을 조건으로 공개하도록 요청했다”며 “설령 법원이 전폭적이고 확고한 승인을 내린다 해도, 그 요청을 하고 있는 문제 유발자들과 급진 좌파 광신자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트럼프는 그동안 엡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냐”며 ‘사기극’이라고 일축해왔으나 지지층 내부에서 분열이 계속되자 관련 내용을 공개하라며 진화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엡스타인과 자신의 오랜 인연을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대해 지난 18일 100억 달러(약 14조원) 규모의 초대형 명예훼손 소송도 걸었다.
WSJ는 트럼프가 2003년 엡스타인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면서 나체 여인의 그림이 포함된 외설적인 편지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WSJ를 ‘역겹고 더러운 신문’이라며 모기업인 뉴스코퍼레이션 창립자인 루퍼트 머독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나는 평생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여성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며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머독은 트럼프가 애청하는 보수 언론 폭스뉴스 등의 대주주로 이번 소송은 트럼프와 보수 언론 간의 갈등으로 확산할 수 있다.
트럼프와 엡스타인은 뉴욕 사교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2000년 초반까지도 가까운 사이였지만 2004년쯤 부동산 매입 경쟁 등으로 불화를 겪은 뒤 소원해졌다고 미국 언론은 전했다. 트럼프는 엡스타인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고, 개인 전용기에 탑승하는 등 가까운 사이였지만 성범죄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트럼프는 2002년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제프를 15년 동안 알고 지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을 나만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중 상당수는 젊은 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인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인 2019년 수감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트럼프는 당시 “나는 오래전에 그와 사이가 틀어졌다. 15년 동안 대화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마가 진영에서는 엡스타인과 민주당 의원 등 유력 정·관계 인사들의 유착이 담긴 이른바 ‘엡스타인 리스트’가 존재한다며 이를 공개하라고 요구해왔다. 또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며 ‘딥스테이트’(정부 내 숨은 권력 집단)가 이를 은폐한다는 음모론도 신봉해왔다. 트럼프 역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민주당 인사들이 엡스타인과 연관 있다는 의혹을 부추겨왔다. 특히 트럼프가 집권 2기 임명한 팸 본디 법무장관은 지난 2월 엡스타인 리스트와 관련해 “지금 내 책상에 앉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엡스타인 리스트가 없다고 발표했고, 이후 마가 진영이 반발하면서 트럼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새다.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엡스타인 사건이 부메랑이 돼 돌아온 모양새다. 최측근에서 저격수로 변신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역시 엡스타인을 무기 삼아 트럼프를 공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마가의 새로운 표적이 됐다”며 “트럼프가 딥스테이트가 됐다”고 논평했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런 이야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모든 성공에서 주의를 돌리려는 피곤하고 한심한 시도”라고 말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