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다 알아듣는다?…백화점 안내도마저 ‘영어 범벅’

입력 2025-07-17 10:11 수정 2025-07-17 16:38
서울 시내 한 백화점. 뉴시스

직장인 박모(25)씨는 최근 서울 중구 한 백화점에서 안내도를 열고는 당황했다. 층내 모든 매장이 영어로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 버전을 잘못 눌렀나 싶어 수차례 ‘한국어’ 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은 바뀌지 않았다. 박씨는 “한글과 달리 영어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데다 표기법이 생소한 브랜드가 많아 안내판을 한참 들여다보고야 원하던 매장을 찾았다”며 “길을 쉽게 찾으라고 만드는 안내판에 굳이 영어를 쓰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일상에 만연한 외국어가 안내판에까지 침투하면서 소비자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외국어를 쓰는 관행이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시내 한 면세점 안내도. A면세점 홈페이지 캡처

16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주요 백화점 3사인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은 모두 안내판에 영어를 혼용하고 있다. 일부 브랜드명을 한국어 병기 없이 영어로만 쓰는 것은 물론 ‘개점 준비중’ ‘팝업스토어’ 같은 표현을 ‘opening soon’ ‘pop-up’ 등으로만 기재해뒀다. 한 백화점은 비상구로 활용되는 입구마저 영어 ‘gate’로만 표기하고 있다.

특히 또다른 백화점의 경우 면세점에 해당하는 층 안내도에서 한국어를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면세점은 다른 매장과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내국인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다.

백화점들은 “젊은 고객층이 많은 점을 고려해 의미 전달에 무리가 없는 단어에 한해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상 아무런 기준 없이 외국어를 남용하고 있다. 같은 층의 팝업 매장인데 어떤 곳은 ‘팝업’으로, 어떤 곳은 ‘pop-up’으로 쓰여 있는 경우도 있다. 한 건물에 2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인 브랜드는 층에 따라 영어와 한국어로 달리 표기돼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일상 곳곳에서 외국어가 범람하면서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과 어린이 등은 불편을 겪고 있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2023년 서울시내 간판 7795개 중 1651개(21.2%)가 외국어로만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뉴판, 비상구 등 필수적인 정보가 외국어로만 쓰여 있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부 박모(67)씨는 “요즘 어딜 가나 외국어가 많은데, 대부분 눈치껏 알아보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 때도 있다”며 “직원에게 물어보기 부끄러워 동행에게 물어보곤 한다”고 토로했다.

간판에 한해선 한국어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사문화돼 실효성이 없는 실정이다. 옥외광고물법은 간판에 외국어를 쓸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하도록 하고 있다.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지만 해당 조항은 면적이 5㎡ 이상이면서 4층 이상에 설치되는 간판에만 적용돼 제한적이다. 일부 지자체는 한글 간판 교체를 위해 지원금을 주는 사업까지 벌이고 있지만 호응은 크지 않다.

외국어 장벽 때문에 소비자가 꼭 필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단순히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시민 안전에 직결되는 안내판까지 외국어로 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기업들이 개선을 위해 자발적인 노력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관련 법규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