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에 강경 대응을 예고한 가운데 러시아 내부에서도 전쟁을 종결할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친(親) 푸틴’에 가까웠던 트럼프의 압박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1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강력한 제재 조치를 내놓자 러시아 일부 지배층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푸틴이 전쟁을 지나치게 밀어붙여 종전 기회를 놓쳤다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4일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과 백악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가 50일 이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합의를 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에 “혹독한”(severe)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러시아는 물론 러시아 교역국에도 ‘2차 관세’가 있을 것이라며 인도와 중국을 겨냥했다.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기존 방침과 달리 대공 방어 무기뿐 아니라 공격용 무기를 대량 제공할 계획도 밝혔다.
이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은 엑스에 “트럼프가 연극 같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트럼프의 50일 시한에 대해 “단지 또 하나의 최후통첩일 뿐이다. 예전엔 24시간, 또 한때는 100일이었고 이런 건 수도 없이 겪었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WP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푸틴 대통령에 대한 불만 섞인 시선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타티야나 스타노바야 카네기재단 러시아유라시아센터 선임 연구원은 “푸틴이 전쟁을 멈출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 화가 난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푸틴의 고집과 비합리적 판단으로 종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센터가 지난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4%가 전쟁 지속보다 평화 협상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달 연속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영토를 추가로 더 요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로이터통신은 이날 크렘린에 정통한 3명의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제시하는 평화 조건을 서방이 수용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할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 중 한 명은 “푸틴 대통령은 미국을 포함한 누구도 평화 협상에 대해 자신과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푸틴 대통령에게는 경제적 손실보다 군사적 목표가 훨씬 더 중요하다. 중국과 인도에 대한 미국의 제재 위협에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들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영향력이 크지 않으며, 세계 시장에 원유를 판매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는 견조한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유럽 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서도 지난해 4.3%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다만 올해는 2.5% 성장세로 둔화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분석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와 관련해 우크라이나가 모스크바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앞서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모스크바를 공격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공격 목표로 삼아도 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모스크바를 겨냥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또 ‘러시아 영토 깊숙한 지역까지 타격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우리는 그것을 할 생각이 없다”며 장거리 미사일 제공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영국 일간지 더가디언은 트럼프가 약속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무기에 대한 세부 내용을 우크라이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하며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 몇 대의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이 전달될지에 대해 혼선이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