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어느 날 성공한 의사로 안정된 삶을 살던 29세 윌리엄 스크랜턴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서 감리교 선교의 문을 연 매클레이 박사가 “조선 선교사로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장티푸스 투병 중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윌리엄은 아내에게 이같이 고백했다. “중앙아프리카를 제외한 곳이라면 어디든 선교사로 나가 헌신하기로 작정했소.” 아내는 한참을 고민한 후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 거기에 제 뼈도 묻겠습니다”라고 답했다.
1885년 52세의 어머니 메리와 함께 조선에 온 윌리엄은 “나는 혁명이 일어나면 국왕을 지지하기보다 백성의 편을 들 것”이라고 일기에 적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섰다. 정동에 세운 ‘시병원’에서는 1892년 한 해 동안 5087건의 진료 중 대부분을 무료로 제공했다.
그의 시선은 더욱 절망적인 곳을 향했다. 전염병에 걸려 성벽 밖으로 버려진 환자들을 위해 애오개, 남대문, 동대문에 시약소를 설립하며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실천했다.
어머니 메리는 조선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1년 동안 학생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난으로 맡겨진 꽃님이가 두 번째 학생이 되면서 점차 학생이 늘어났다. 1887년 고종이 ‘이화학당’ 이름을 하사하며 정식 인정받았다.
1909년 메리가 세상을 떠날 때 수많은 한국인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함께 걸으며 눈물로 배웅했다. 그녀는 단지 외국인이 아닌 ‘조선을 사랑한 어머니’로 기억됐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10일 오후 2시 서울 아현감리교회에서 열린 ‘개신교 한국선교 140주년 기념학술제’에서 소개됐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선교국이 주관한 이번 학술제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헌신, 그리고 그들이 남긴 선교 유산이 깊이 있게 조명됐다.
서영석 협성대 교수는 ‘메리 및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한국 선교’를 주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한 의료·교육 선교의 의미를 부각했다.
소요한 감신대 교수는 ‘아펜젤러 가문의 신앙과 의의’ 발표를 통해 1세대와 2세대에 걸친 선교 정신을 조명했다. 소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사는 한 인물의 생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2세대 연구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1세대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가 ‘선포적 방식’으로 복음의 확신을 강조했다면 2세대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선교 현장에서 고민하고 녹여내려는 성향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2세대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40년 강제 추방당한 후에도 한국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는 ‘기독교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관리자로서 1951년 50만 명, 1952년 90만 명, 1953년 거의 100만 명에게 구호 물품을 나누어주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했다.
김칠성 목원대 교수는 ‘한국개신교 선교 역사 기념에 관한 연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했다. 현재 2025년을 140주년으로 기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41주년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1934년과 1984년 50주년과 100주년을 기념할 때 한국개신교는 1884년을 선교 시작 시점으로 정했다”며 “엄밀한 의미에서 올해는 141주년이지만 과거에도 다음 해를 함께 기념했다는 점에서 올해 140주년 기념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2034년 150주년에는 한국개신교 전체가 아름다운 전통을 후대에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학술회에 앞선 예배에서 김형래 아현감리교회 목사는 “지난 4월 서울연회를 앞두고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묘비를 양화진 메리 스크랜턴 묘 옆에 설치했다. 6월에는 교회 성지순례로 윌리엄 스크랜턴 묘가 있는 일본 고베를 방문했다”며 “앞으로도 스크랜턴 선교사의 선한 사마리아인 선교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황병배 기감 선교국 총무는 “메리 스크랜턴과 윌리엄 스크랜턴은 성육신적 선교를 실천한 진정한 선교사”라며 “소외된 사람 가운데 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육신과 영혼을 고친 진정한 의사였다”고 평가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