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부인 기린 ‘한글 비석’…청주 여성 교육의 뿌리였다 [현장]

입력 2025-07-04 17:55 수정 2025-07-04 17:57
청주제일교회 마당에 있는 ‘로간부인기념비’. 1921년, 로간 부인에게 한글을 배운 여성 신도들이 직접 돈을 모아 세운 것으로, 남한 최초의 순수 한글 비석으로 추정된다.

근대 교육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청주제일교회 앞마당 한편엔 오래된 한글 비석이 하나 있다. 1921년, 글을 깨친 여성들이 스승을 기리기 위해 직접 세운 ‘로간부인기념비’. 그 옆으로는 남한 최초의 장로교 여성 신도 조직인 ‘여신도회’의 100주년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두 비석은 100여 년 전, 청주 지역 여성들이 글을 배우고 스스로 공동체를 조직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료다. 여기서 시작된 여성 교육의 흐름은 탑동 선교 기지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일신여중고 설립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4일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총무단과 함께 충북 청주 기독교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척박한 한반도에 여성 교육이 들어온 시작점을 따라가봤다.

로간 부인이 한복을 입은 초기 여성 신도들이 함께 찍은 사진.

문화유산으로서 비석을 떠올리면 보통 한문이 가득한 글귀를 떠올리는 것과 달리, 여신도들이 자비로 세운 로간부인기념비는 순수 한글 비석인 점을 주목할만하다. 이건희 청주제일교회 담임목사는 “로간 부인은 봉건 사회에 들어와 이 지역 여성들의 계몽 활동, 즉 문맹 퇴치와 한글 교육에 집중하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비량 선교 활동을 펼친 그의 헌신은, 억압받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배움은 곧 행동으로 이어져, 1913년 이곳에서는 남한 최초의 장로교 ‘여신도회’가 조직됐다. 이 목사는 “여성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었기에, 스승의 비석을 세울 때도 한문이 아닌 한글을 고집할 수 있었다”며 “만약 교회의 공식 기구인 당회가 만들었다면 한문 투성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청주제일교회 담임목사가 4일 충북 청주 청주제일교회에서 교회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청주제일교회는 이처럼 여성 교육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부통령을 지낸 5대 담임 함태영 목사가 훼손을 막기위해 교회로 이전시킨 ‘망선루’ 건물에서는 초등학교, 간호학교뿐 아니라 YMCA, YWCA 등 당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수의 교육이 이뤄졌다.

여성 교육이라는 토양 위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담긴 기지가 세워졌다. 답사단의 발걸음이 향한 탑동 언덕의 양관(서양식 건물)들이 바로 그곳이다. 1906년부터 선교사 주택과 병원, 학교 등으로 지어진 6채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약 70년간 52명의 선교사가 활동한 무대였다.

이곳에서 여성 선교사 허마리아(매리 허브스트)는 한국전쟁 후 시각장애 전쟁고아들을 위해 1952년 청주맹학교를 설립했다. 6호 양관은 ‘소민병원’이라는 이름의 근대식 병원으로 운영되었다. 여성 교육의 정신이 사회 가장 약한 곳을 돌보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충북 청주 탑동 양관 6호 앞에 민노아 선교사 등과 함께 있는 묘역에 있는 로간 부인의 비석.

이 기지를 처음 세운 민노아 선교사의 헌신 또한 깊다. 김성수 청주성서신학원 원장은 “민노아 선교사는 문학가로서 정철의 가사를 연구해 곡조에 맞는 찬송가 가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민노아 선교사는 청주에서 아내 안나 라이네크와 두 아들을 잃는 비극 속에서도, 현재까지 찬송가에 실려있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등 5곡을 작사했다. 또 “나를 양화진이 아닌 청주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묘는 지금도 탑동 선교사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닦아놓은 여성 교육의 토양과 헌신의 기지는 오늘날 ‘일신여자중고등학교’로 계승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은 선교사들이 세운 바로 그 터전 위에,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여성 교육을 지속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일신여고 교정 안에서 학생들은 100년 전의 붉은 벽돌 양관과 선교사들의 묘지를 일상적으로 마주한다.

충북 청주 탑동 제1호 양관. 병원과 진료소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에느 학교 교실로도 쓰였다.

탑동 양관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이 유산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8개 도시와 함께 추진되고 있다. 등재의 선결 과제였던 1호 양관의 소유권 회복을 위해, 지역 교계와 시민 사회가 참여한 ‘탑동 1호양관 회복추진위원회’는 “120년의 공간, 우리 손으로 지켜요”라는 표어 아래 자선 콘서트를 여는 등 보존을 위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글·사진=청주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