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은 모두 하나님 뜻 부합”…정말 그럴까

입력 2025-07-03 15:00
인류 최초의 여인인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딴 이후 인류에게 벌어진 일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서구 사회에선 사과를 선악과를 상징하는 과일로 봤습니다. 사진은 손을 뻗어 사과를 따려 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기독 고전 맛집’의 세 번째 책인 ‘Good or God? 무엇이 선인가’(두란노)는 고전보단 신서(新書)에 가깝습니다. 미국서 2015년 출간된 이 책의 저자는 기독 인기도서 작가 존 비비어인데요. 책은 ‘존 비비어의 순종’과 함께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저자에 관한 평은 갈리지만 책이 기독교인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선(善)과 내 기준에서의 선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의 원제는 ‘Good or God?’으로 ‘선인가 신인가?’란 뜻입니다. 절대선인 하나님의 대척점에 악(惡)이 아닌 선을 놓다니, 뭔가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제목으로 선과 신이란 양자택일 구도를 취하며 ‘선한 것도 하나님 뜻에 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선한 의도라도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들어맞는 결과를 얻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일부.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보입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저자는 일례로 에덴동산 속 선악과를 듭니다. 인류 최초의 여인인 하와의 시선에서 선악과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며 인간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합니다.(창 3:6) 선악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선악과는 선에 더 가깝겠지요.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게 자신에게 이득일 뿐 아니라 선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이로써 인류 전체가 파국에 치닫습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선악을 구분하는 건 일견 간단해 보이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유럽 경구처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 14:12)이라는 말이지요.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너그러움·겸손·정의는 선한 것, 이기심·오만함·잔인함은 악한 것. 이 둘을 구분하는 건 매우 간단해 보인다.…(그렇지만) 선한 것이 그렇게 명백하다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선을 알아보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히 5:14)고 가르치는가.” 뱀도 하와를 유혹할 때 험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져 선악을 구별할 수 있다”며 선악과를 먹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하지요.

선악 구분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모호한 것투성입니다. 사진은 미로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는 3D 캐릭터 이미지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겉으론 쉽사리 구분하기 힘든 선과 악,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모든 일을 하나님 관점으로 볼 것”을 권합니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는 최근 ‘주말의 명작’ 설교에서 이를 ‘가장 중요한 신앙 훈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좋은 신앙인이 필히 갖춰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관점으로 본 선의 특징 중 하나는 ‘거룩’입니다. 저자는 “거룩은 경건한 행동으로 나타나야”하며 “편의상 하나님 말씀 일부를 배제하면 안 된다”고 당부합니다. 또 삶에서 거룩함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 경외심을 품어야 “악을 미워하고 분별할 수 있으며 그분의 뜻에 즉각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관용구 가운데 “좋은 게 좋은 거다”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응수하지 않을까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추구하고, 하나님 뜻을 분별해 정직하게 순종하라’고요. ‘좋은 게 좋은 것’과 하나님의 뜻, 둘 중에 어떤 길을 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