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도 교산교회(박기현 목사) 앞마당에 버스 한 대가 멈췄다. 조심스레 내리는 이들. 손을 뻗고, 팔을 잡고, 서로를 향해 조용히 길을 연다. 자원봉사자의 말에 따라 한 시각장애인 목회자가 손끝을 움직인다. 거친 표면, 낮게 돋아난 얼굴 윤곽. “이건 조지 존스 선교사(1867~1919) 선교사님 얼굴이고요, 그 옆이 이승환 권사님이에요.” 보이지 않아도 손끝이 먼저 이해한다. 오늘의 순례는 ‘보는 여행’이 아닌 ‘느끼는 여행’이었다.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라고 밝힌 서민택 삼성교회 목사는 기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만져지는 모든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 같습니다. 이 역사를 직접 제가 ‘보게’ 되네요.”
AL미니스트리(대표 정민교 목사)와 토비아선교회(대표 김덕진 목사)가 30일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기독교 역사 순례 프로그램 현장이다. ‘강화도의 역사와 함께하는 순례’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시각장애인 목회자 13명과 자원봉사자 17명이 함께했다. 조문섭 토비아선교회 목사가 순례길 안내를 맡았다.
교산교회는 1893년 강화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로 평민 이승환과 양반 김상임의 회심을 통해 복음이 퍼진 상징적인 장소다. 신분과 계층을 넘어선 복음 공동체의 시작점이자, 강화도 감리교 전파의 뿌리로 평가받는다.
조 목사는 교회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승환 권사가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이야기부터 신앙이 없는 어머니를 위해 주막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하며 기도했던 일화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시각장애인들의 입술에선 감탄과 놀라움이 연신 나왔다.
조 목사는 “우리는 부흥만을 말하기 전에 교회를 세운 이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도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있는가’ 이 질문을 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교회 앞마당에는 이 권사 어머니의 세례 장면을 기념하는 ‘선상세례’ 모형이 설치돼 있다. 참가자들은 직접 모형에 올라가 손으로 만지고, 세례 장면을 재현하며 복음을 더 깊이 새겼다. 재현 이후로는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선의 연주로도 이어졌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맨해튼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그는 ‘십자가의 전달자’ ‘사명’ 등을 연주하며 순례자들의 발걸음에 울림을 더했다.
“만질 수 있다는 게 다르네요. 기존 성지순례는 그냥 걷고 듣기만 했는데, 오늘은 복음을 손끝으로 느꼈습니다.” 김기화 대구하늘빛교회 목사의 말에는 감격이 묻어났다. 그는 “일반 성지에서는 대부분 유물이나 구조물을 만지는 것이 제한되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며 “시각적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촉각을 통해 더 생생하게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성지순례였다”고 말했다.
이어 방문한 곳은 강화읍 언덕 위에 자리한 성공회 강화성당. 이곳은 ‘절 같은 교회’로 불린다. 한옥 형태의 외산문과 내산문, 기와지붕을 얹은 본당은 사찰이나 향교를 떠올리게 했다. 참가자들은 안내자의 손끝을 따라 문을 더듬고,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며 복음의 토착화를 체험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서양 고딕 전통의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 내부는 소나무 기둥이 줄지어 있고 날개 회랑이 길게 뻗어 있다. 전통 한옥 외관과 서양식 구조가 조화를 이룬 이 성당은 1900년 첫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예배는 봄·여름·가을에 이어지고 있다.
성당 안에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비롯해 강화성당의 역사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액자 속을 짚으며 십자가의 여정을 설명하면 시각장애인 목회자들은 손끝으로 고통의 길을 더듬는다. 자원봉사자 이선미(41)씨는 이같이 설명했다. “지금 만지는 이것은 의자고, 옆에는 창문이 있네요. 사진을 보니깐 당시엔 하얀 천으로 남녀 구분을 했대요.” 손을 꼭 잡고 설명을 듣는 송문경 말씀교회 부목사는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순례길의 마지막 방문지는 온수리교회였다. 성공회가 세운 이 교회는 순례의 종착지이자 강화 복음 전파의 또 다른 발판을 의미했다. 참가자들은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언덕을 내려왔다.
정민교 AL미니스트리 대표는 “이번 순례를 통해 함께한 비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이 촉각으로도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인식 개선은 이론이 아니라 동행하고 살아가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순례는 새로운 콘텐츠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독교 역사 순례 코스를 시각장애인들이 촉각으로 느낄 수 있게 구성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이 사역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강화도(인천)=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