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 오지서 ‘밀알’된 소방관 출신 70대 선교사

입력 2025-06-24 14:46 수정 2025-06-25 15:23
최봉진 선교사가 마다가스카르 ‘오차로구미교회’ 앞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의 아이들이 세례 증서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최 선교사 제공

붉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아프리카 남동쪽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브리카빌 마을.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도 차로 8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다. 마을의 유일한 이방인인 최봉진(72) 선교사가 바게트 빵 자루를 메고 나타나면 맨발의 아이들이 “파스테루(목사님)”라 외치며 환하게 달려온다. 빵을 잘라 나눠줄 때면 “미누 제수시, 마하주 라니트라(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건넨다.

최 선교사는 3년 전, 누군가는 은퇴를 꿈꿀 나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머나먼 마다가스카르 땅을 택했다. 젊은 시절 119 구급대원으로 재난 현장과 화염 속에서 생명을 구하던 그는 인생 2막에 메마른 땅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봉진 선교사와 김광숙 사모가 24일 서울 강남구 한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 선교사는 24일 서울 강남구 한 사무실에서 진행한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니 감당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한 달여 간 머무른 그는 이날 밤 다시 아내 김광숙(70) 선교사와 마다가스카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밀알’이 되라는 부르심

아이들이 마다가스카르 ‘오차로구미교회’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최 선교사 제공

최 선교사와 마다가스카르와의 인연은 3년 전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원래 일본 선교를 준비하던 그에게 지인을 통해 “마다가스카르에서 10년간 사역한 김홍섭 선교사(당시 84세)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교회를 맡아줄 후임자가 필요하다”는 간절한 요청이 왔다. 고심 끝에 그는 홀로 마다가스카르로 떠나 한달간 머물렀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열악한 환경과 언어 장벽에 부딪혀 사역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유 없이 집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병상에 누워 고통과 씨름하던 그에게 문득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이었다. 최 선교사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언어의 벽 넘어, 삶으로 전하는 복음

주일이면 그가 사역하는 ‘오차로구미교회’는 200여 명의 현지인으로 가득 찬다. 이 교회는 그의 전임자인 김홍섭 선교사가 세운 곳이다. 과거 한국전력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했던 김 선교사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침례교회를 지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보수) 소속인 최 선교사는 교단과 상관없이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던 그 사역을 이어받았다.

강단에 선 최 선교사의 입에서는 또렷한 말라가시어가 나온다. 그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현지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정공법을 택했다. 매주 한글로 설교문을 써 번역기로 옮긴 뒤, 그 발음을 다시 한글로 받아 적어 통째로 외우는 고된 과정을 반복했다. 최 선교사는 “그렇게 1년을 하니 조금씩 읽히기 시작하더라”며 “설교 노트가 지금 10권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봉진 선교사의 김광숙 사모가 마다가스카르 현지 아이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있다. 최 선교사 제공

이런 진심이 통했을까. 이제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뿐 아니라 자녀가 사고를 치는 등 중요한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한다. 아내 김 선교사는 “현지 사람들은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강하다”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교회로 달려와 기도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그는 매 예배 후 성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주일에는 현지 음식인 ‘짜라마수’(콩, 소고기, 밥)를, 목요일에는 바게트 빵을 제공한다. 김씨는 가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에 감동받는다고 했다. 김씨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모두 헌금을 한다. 고아에게는 이웃이 돈을 쥐여줄 정도”이라며 “교회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아껴뒀던 신발을 교회 앞에서 신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믿음
평온해 보이는 이 땅에도 아픔은 있었다. 지난 2월 21일, 동역자였던 고(故) 김창열, 이리문 선교사가 현지 강도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최 선교사에게 이들의 비보는 더욱 큰 아픔이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최 선교사의 교회를 방문해 함께 교제했던 동역자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사위인 이 선교사님이 농기계를 잘 다루셔서, 우리 교회 트랙터를 수리해주고 현지인들에게 농기구 교육도 해주고 싶어 했다”고 회상했다.

최 선교사는 “사건 이후 순수하게만 보였던 현지인들이 다르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흔들렸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의 불안을 먼저 알아챈 것은 현지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최 선교사에게 “목사님, 우리 브리카빌 사람들은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그를 위로했다.

마다가스카르 브리카빌 ‘오차로구미교회’의 주일 예배 풍경. 현지인 리더가 성경을 낭독하는 가운데, 아이부터 노인까지 200여 명의 성도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최 선교사 제공


교인들의 따뜻한 위로는 큰 힘이 됐지만, 낯선 환경과의 싸움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최 선교사는 “나도 신이 아닌 육체를 가진 인간인데 어떻게 매일 강할 수 있겠나”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특히 폐쇄공포증이 있고, 어둡고 캄캄한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전기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있나 싶을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만의 극복 방법에 대해 “솔직히 ‘하나님, 힘듭니다. 죽겠습니다’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가 있다”며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119’에서 ‘영혼 구원’으로… 인생 2막에 멈추지 않는 도전

최 선교사는 젊은 시절 19년간 소방관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그는 “제 주민등록번호에 119가 두 번이나 들어가는데, 젊었을 때는 생명을 구하고, 이제는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5세 때 아버지의 중풍을 낫게 하려고 한 기도원을 찾으면서 신앙생활에 발을 들였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서지 못했던 그는 35세에 기도를 통해 아내의 병이 낫는 과정을 겪으며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술과 담배를 끊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들어선 그는 늦깎이로 신학을 시작해 목회자가 되었다. 이후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며 노인들을 섬기는 구제 사역에 힘쓰기도 했다.

최봉진 선교사와 김광숙 사모가 24일 인터뷰에서 스마트폰에 담긴 현지 사역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최 선교사의 모든 사역은 스스로 경비를 해결하는 ‘자립 선교’의 형태를 띤다. 선교사가 파송을 받으면 교단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들 부부는 개인적인 헌신과 믿음으로 사역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김씨가 재정을 전적으로 뒷받침하고, 1년에 한두 차례 현지를 방문해 남편의 사역을 돕는다. 떨어져 지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동역하는 셈이다. 김씨는 “나이가 들어 자녀에게 의지하기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부부가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며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에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