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유산을 귀하게 여기는 일본인 지식인의 거듭된 노력 덕분에 일제강점기 일본에 반출된 조선 왕실 사당이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조선시대 왕실 사당으로 추정되는 ‘관월당(觀月堂)’의 소장자인 일본 가마쿠라시 고덕원(高德院)과 양도 약정을 체결해 건물을 해체하고 부재의 한국 이송을 완료했다. 국가유산청은 2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고덕원 주지이자 일본 게이오대 교수인 기증자 사토 다카오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과 보고회를 가졌다.
해외에 있는 건물이 통째로 환수되는 사례는 처음이다. 특히 일본인 기증자 측은 건물 해체와 한국 이송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해체 작업은 지난해 6월 진행됐고 부재는 현재 파주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일본에서 관월당으로 불렸던 건물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 형식의 소박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부 암막새 기와에는 용무늬, 박쥐무늬가 있고 창덕궁 신선원전 등에서 쓰이는 부재가 사용됐다. 이렇듯 화려하고도 격식 있는 의장을 추구한 것에 미뤄 학계에서는 이 건물이 왕실 관련 건물로 당초 서울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2024년 해체 당시 상량문 등 건립 관련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건물의 원래 명칭, 조선에서의 위치, 배향 인물 등은 향후 지속해서 연구할 과제로 남아있다.
일본 현지에서의 정밀실측 및 해체 과정에서 관월당은 일본으로 이건 후 양식과 구조 측면에서 일부 변형된 것으로 밝혀졌다. 기단의 경우 일본 가나가와현 등에서 채석되는 안산암과 응회암이 사용됐다. 기단 내부는 뒤채움 없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안산암이나 응회암을 사용하고 기단 내부가 비어있는 사례는 조선 시대 건물 중 찾아보기 어렵다.
이 비운의 건물은 1920년대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고덕원 측은 누리집을 통해 “1924년 (일본의 기업가인)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1870∼1939)가 도쿄 메구로 자택에 있던 것을 옮겨 사찰에 기증했다”고 설명했다. 학계 안팎에서는 조선 왕실이 돈을 빌리면서 관월당 건물을 담보로 잡혔고, 이후 조선식산은행이 재정난으로 융자받을 때 야마이치 증권의 초대 사장인 스기노 기세이에 증여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관월당은 이후 일본 도쿄로 옮겨졌고, 1930년대에는 스기노 기세이가 가마쿠라시의 고덕원이라는 사찰에 기증하면서 고덕원 경내로 옮겨졌다. 해체 전까지 관음보살상을 봉안한 기도처로 활용됐다.
관월당의 존재는 근대건축 전문가인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1997년 펴낸 저서 ‘일본을 걷는다’(한양출판)에서 소개하며 알려졌다. 김 교수는 “(궁궐 내에 있던) 내불당(內佛堂)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번 국내 귀환은 소장자인 사토 주지가 관월당이 유래한 한국에서 보존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이뤄졌다. 사토 주지는 “100여년 전 일본에 온 유물을 중요하게 여겨 잘 보관해왔다. 주지로 취임한 25년 전부터 어떻게 돌려보낼까 생각했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있어서 돌려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소회를 밝혔다.
관월당은 2010년에도 한차례 귀환이 추진된 바 있다. 하지만 협상 중에 국내 언론에 사전 공개되며 일본 내부에서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이번에도 2019년부터 고덕원 측에서 한국에 보존 관련 연락을 해오며 학술 연구를 우선 제안해 반환의 물꼬를 텄다. 사토 주지는 해체와 운송 등 일본 내 제반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는 등 협업 프로젝트 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고덕원은 관월당 보존은 물론, 한일 양국 간 문화유산에 대한 학술교류를 지속해서 지원하기 위해 별도 기금을 마련해 국외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광복 80주년과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해에 이루어진 귀환이 양국 간 문화적 연대와 미래지향적 협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