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모든 걸 해결할 거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미국 ‘CSI’ 같은 드라마 때문일 테죠. 그렇지만 그 또한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수사의 중요한 축이라는 얘기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국내 법의학계 권위자로 꼽히는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 교수는 23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진행된 KBS 2TV 과학수사 토크 프로그램 ‘스모킹 건’ 100회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100회를 맞은 프로그램에 1회부터 고정 출연해 온 그가 처음 합류를 결심했던 배경에도 ‘사람’이 있었다.
유 교수는 “본업이 바쁘다 보니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땐 거절했다”며 “그런데 일반적인 흥미 위주의 범죄 프로그램이 아닌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노고와 과학적 접근 방법을 소개할 수 있는 뜻깊은 프로그램이라는 PD님의 설득에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수많은 범죄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가운데 우리 프로그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사건 수사에 참여하는 경찰과 검찰, 과학자, 법의학자들의 노력으로 결과가 좌우된다는 점에 흥미를 느껴주신 시청자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정적 단서를 뜻하는 ‘스모킹 건’은 여타 범죄 수사 관련 프로그램과 다르게 ‘과학수사’ 현장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과학수사의 중요성과 역할을 알리고자 한다는 게 프로그램의 취지다. 2023년 3월 29일 처음 방송된 이래 매회 다른 사건을 다뤄 온 프로그램은 마니아층의 지지에 힘입어 2~3%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스모킹 건’을 통해 잔혹 범죄의 시대적 변천과 이를 해결하려는 형사들의 변함없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게 유 교수의 말이다. 그는 “1980~90년대에는 정치적 불안 때문에 치안력이 공안에 주로 쓰여 지방에서 이춘재 강호순 유영철 같은 범죄자들의 연쇄살인이 많았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정신과적 문제로 인한 동기 불명의 잔혹 범죄가 잦다”면서 “우리는 수사에 활용된 과학수단을 보여드리는 것뿐 아니라 ‘왜 그랬는지’에 대한 분석도 같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MC를 맡은 방송인 안현모는 프로그램의 인기 이유로 유 교수를 꼽았다. 그는 “유 교수님이 고정으로 프로그램을 맡으신 게 처음이다. 매주 같은 시간에 스튜디오에 와서 녹화하는 게 부담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외에 응해주신 것이 우리 프로그램 성공의 초석이었다”고 치켜세웠다.
또 다른 비결로는 사건 관계자들의 출연을 들었다. 안현모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 방송인이나 유명인을 섭외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말솜씨가 투박하더라도 실제 수사를 담당하셨거나 변호를 담당하신 분들, 혹은 사건 피해자의 유가족 등이 출연해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그런 분들을 매회 섭외하는 제작진의 노고가 컸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유 교수와 함께 1회부터 프로그램을 이끌어 온 안현모는 초창기에 끔찍한 사건을 접하며 정신적으로 힘들었으나 점차 세상을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프로그램과 같이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면서 “보통은 ‘어떻게 하면 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를 말한다면 우리 프로그램은 ‘어떻게 하면 이 사회가 범죄 피의자를 양산하지 않을까’를 이야기한다. 그런 취지를 시청자들도 이해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연출은 맡은 김종석 PD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진정한 스모킹 건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아무리 수단이 좋아도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와 용기가 없으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과학 발전에 따라 같은 사건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며 “예전에는 ‘그냥 미친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 죽이는 거야’라고 했다면 이제는 범죄심리 분석을 통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그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사회에 던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는 24일 방송되는 100회에서는 2019년 1월 충남 서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다. 당시 전국을 돌며 범인 검거 작전을 벌인 서천경찰서 이견수 경사가 직접 출연한다. 유 교수는 “사회의 암을 비추지만, 명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수 프로그램이 됐으면 한다”며 “앞으로 후배 법의학자들도 출연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김 PD는 “유 교수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함께하실 것”이라며 웃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