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아프리카 대륙에서 낯선 한국 땅의 자유를 위해 달려온 에티오피아 청년들이 있었다. 75년 세월이 흘러 그들 중 두명이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올해 80주년은 맞은 포항 양포교회(김진동 목사)와 계명대학교의 초청으로 뜰라운 테세마(100)와 벨라체우 아메네쉐와(92) 참전 용사를 비롯 전사자의 자녀 마미투 훈데(73)와 에프렘 하일아들(50) 등 7명이 지난 19일 한국을 방문했다.
22일 포항시 남구 양포교회 앞 잔디마당,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참전 전우들의 감동적인 재회가 펼쳐졌다. 포항지회 6·25 참전용사, 참전학도의용군회,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지팡이와 휠체어로 잔디마당에 들어선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박수로 맞이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빛과 맞잡은 손끝엔 깊은 연대와 전우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진동 목사는 이날 참전용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군목 시절 입었던 군복을 입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양포교회 부임 전 글을 모르는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대신 적어 국방부 공모에 응모했고, 그 수기가 책으로 출간됐다”며 “그 일을 통해 참전용사를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부임 후에는 행사 규모를 넓혀 매년 6·25 참전용사를 초청해 감사와 존경을 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예배시작 전 태극기와 에디오피아의 국기가 입장하고 그 뒤를 이어 참전용사들의 입장이 이어졌다. 김 목사는 ‘여호와께서 지키시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며 “이 나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주께서 이 민족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고 전했다.
이어진 기념식에서는 올해 100세를 맞은 뜰라운 참전용사를 위한 깜짝 생일 파티가 열렸다. 아내 아베베치와 함께 강대상에 오른 그는 전우들의 따뜻한 축하에 가슴이 북받쳐 올라,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죽기 전에 꼭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사랑하셔서 앞으로도 더욱 번영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며 “전쟁터에서 함께 싸운 전우 여러분 모두 건강하길 기도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참전용사 벨라체우는 “이렇게 따뜻하게 환영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 나섰지만 함께 이겨낸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전우”라며 “가난했던 한국이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한 모습을 보니 매우 기쁘다.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6·25 참전용사 이춘술(94) 포항지회장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전우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정말 반갑다”고 말했다.
“100세를 맞은 전우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며, 그가 전우들의 따뜻한 축하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도 벅차올랐습니다. 함께했던 전쟁의 기억이 떠오르며, 오늘 하루가 더없이 특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참전 후 고국에서 고초 겪은 ‘강뉴부대’
6·25 전쟁 당시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는 에티오피아였다. 에티오피아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우리 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파병된 부대는 에티오피아 황실의 최정예 근위병으로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초전박살’의 뜻을 담아 이들을 ‘강뉴부대’라 명명했다. 이들은 3주간 배를 타고 1만4500㎞를 항해해 부산항에 도착했다.
1951년 7월 미 7사단에 배속된 강뉴부대는 최정예 정찰대를 파견해 적의 전초기지를 초토화 시켰다. 같은 해 9월 21일 강원도 철원 적근산 삼현 전투에서는 중공군 전초기지를 점령하고 방어 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활약으로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온 강뉴부대 전우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국의 매서운 칼바람과도 싸워야 했다. 벨라체우 참전용사는 “우리에게 한국의 추위는 너무도 낯설고 혹독했다”고 회고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중 얼음이 깨지며 한 전우가 물에 빠졌어요. 금세 다리가 얼어 동상에 걸릴 뻔했죠. 우리는 급히 전우의 신발을 벗기고 다리를 주무르며 살리려 애썼어요. 그때의 추위는 총탄만큼이나 두려웠습니다.”
2년여의 참전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는 총 5차례에 걸쳐 6037명을 파병했다. 이 중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그럼에도 철저한 훈련과 강한 정신력을 지닌 강뉴부대는 253회의 전투에 모두 승리했고 연합국 중 유일하게 전쟁포로가 없는 용맹한 부대로 기록됐다.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아디스아바바 시내의 ‘코리아 사파르’(한국촌)에 정착했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오랜 가뭄과 부정부패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1974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듬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전쟁영웅이던 참전용사들은 동맹군(공산군)과 싸운 배신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정부가 들어섰지만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다.
참전용사 후손들 “아버지 자랑스러워”
하옥선(65) 권사(에디오피아 굿뉴스 처치)는 30년간 에티오피아에서 참전용사와 미망인, 후손들을 돌봐오고 있다. 그는 “처음 참전용사들을 만났을 때 정부의 지원이 없어 사무실도 없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모임을 하고 있었고 후손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직업조차 갖지 못하는 열악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95년 직업군인이자 태권도 사범으로 파병된 남편을 따라 에티오피아에 들어왔다. 아버지 역시 6·25 참전용사였기에 현지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에게 가족 같은 정을 느꼈다고 했다.
“에티오피아 현지에 6·25 참전용사였던 한국인 한의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한인촌 진료에 나설 때 함께 따라가 약을 뿌리며 이 잡는 일을 돕던 것이 봉사의 시작이었어요.”
하 권사는 남편이 1년 만에 한국 부대로 복귀한 후에도 홀로 에티오피아에 남았다. 자녀들을 키우며 참전용사들을 계속 돌본 그는 마치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참전용사들과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후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떠날 수 없었던 이유를 전했다.
그는 “참전용사를 통계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참전용사 6000여명에 그 배우자까지 포함하면 약 1만2000명이고 이들이 자녀를 평균 2~3명씩 낳았다고 가정하면 수만 명이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참전용사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전사자의 딸 마미투의 삶의 고백에서 그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마미투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임신 3개월이던 시절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셨고 끝내 전사하셨다”며 “가장이 된 어머니는 매일 해발 3400m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셨다”고 말했다.
“생활이 어려워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식모살이를 하다 15살에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습니다. 18년 전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 네 아이와 병든 어머니를 홀로 책임지며 살아왔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지방자치단체,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이 나서 의료시설·학교·복지회관 등을 지어주고 참전용사와 후손에게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후손들의 한국 유학과 기술교육도 돕고 있다.
하 권사는 “참전용사의 집을 고쳐드린 지 사흘 만에 어르신이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참전용사의 후손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한국전쟁에 참전한 덕분에 내 자손들이 편안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여한이 없다며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고요. 그 말을 듣고, 더 늦기 전에 한 분이라도 더 돕고자 마음을 다해 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에프렘 역시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참전용사회에서 간사로 섬기고 있는 그는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게 된다”며 “아버지 덕분에 이곳에 올 수 있었고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한국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하 권사는 참전용사들의 진료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세명기독병원의 후원으로 청력에 불편을 겪던 이들을 위해 이비인후과 진료를 주선했다. 진료 결과 벨라체우 참전용사는 오랜 세월 앓아온 이석증을 치료받았고, 보청기를 착용해온 에프렘은 선천적으로 양쪽 고막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돼 수술을 앞두고 있다.
하 권사 역시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긴급히 한국으로 이송됐다. 기억이 하얗게 지워진 채 6개월 동안 멍한 상태로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 다시 인수인계를 위해 에티오피아에 들어갔는데, 참전용사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고 회고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잠시 쉼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여전히 에티오피아에 머물며 마지막 한 분까지 참전용사들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합니다. 후손들에게도 조부들의 희생을 알리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사명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벨라체우 참전용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주저 없이 한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하루빨리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소망도 전했다.
전사자의 딸 마미투 훈데는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살아온 제게 이렇게 따뜻한 관심과 초대를 베풀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저희 가족은 단 한 번도 한국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희생을 기억해주시고 이렇게 품어주시는 한국에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방문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이자 선물입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