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갇힌 아버지, 돌아오길”…납북선교사 아들 ‘세송이 물망초’ 품다

입력 2025-06-23 06:00
최춘길 선교사 아들 최진영씨가 22일 서울 국민일보빌딩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2015년 6월 23일. 북한 당국은 중국과 북·중 접경에서 탈북민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한국인 선교사 두 명에게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김국기·최춘길 선교사 이야기다. 함께 억류된 김정욱 선교사까지. 세 명 모두의 생사는 10년이 흘러서도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세월 동안 가족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기다려야 했다. 최춘길 선교사의 아들 최진영(35)씨는 2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아버지뿐 아니라 납북 선교사들의 존재와 고통이 결코 잊히지 않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현재 북한에는 선교사 3명을 포함해 우리 국민 6명이 강제 억류돼 있다. 김정욱 선교사는 2007년부터 중국 단둥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탈북민 구출에 앞장섰다. 2013년 10월 체포된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지하교회 설립 등 범죄 혐의를 자백하도록 강요받았고 국가 전복 음모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국기 선교사는 2003년 꽃제비와 탈북민을 위한 탈북자 쉼터를 운영하면서 농기계와 생필품 등을 북한 주민에게 지원했다. 그는 2014년 10월 북한 공작원에게 체포됐다. 최춘길 선교사는 탈북민 지원 사역을 펼치다 같은 해 12월 북한의 유인으로 실종되면서 납북된 것으로 파악된다.

“억류 사실을 안 건 불과 1년 반 전이였습니다.”

진영씨는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통일부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아버지의 억류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이라 생각했을 만큼 믿기지 않았다. 기사를 찾아보니 이미 10년 전 김 선교사와 함께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그는 “그때 충격으로 연차를 내고 일주일간 집 밖에도 나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북한은 세 선교사의 생사조차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독일 베를린 북한대사관 앞 시위 현장을 찾았다. 매주 목요일마다 납북된 선교사들의 석방을 촉구해온 게르다 에를리히 여사를 직접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세 송이 물망초 배지’를 달기도 했다. 또 유엔 인권이사회와 유럽의회, 국제 인권단체를 찾아 세 선교사의 석방을 호소하며 편지를 전달했다.

진영씨는 정부와 국민, 교계가 끝까지 함께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그는 “이 기다림은 더는 우리 가족만의 몫이어서는 안 된다”며 “국민께서는 오토 웜비어는 기억하시면서도 세 선교사님의 이름은 잘 모르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북한에서도 외부에서 뉴스가 전해지면 억류자에게도 간접적으로 전달된다고 들었다. 국민이 끝까지 잊지 않고 목소리를 내주신다면 그 자체가 세 분께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김국기·김정욱 선교사님은 복음의 본질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라며 “그 길이 외롭지 않도록 끝까지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새 정부와 관련해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 생명 보호’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을 했다”며 “억류 국민의 안전한 송환은 정치 논리를 넘어 대한민국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남북관계가 아무리 복잡해도 한 사람의 생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모든 수단을 다해 꼭 돌아오실 수 있게 해달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아버지를 어떤 분으로 기억하고 계시는가.
“사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 마지막이었고, 그전에도 주말마다 잠시 오시는 ‘기러기 아빠’셨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시절이 가장 기억이 많습니다. 자주 뵙진 못했지만 학교 앞에 와서 필요한 걸 물어보시고, 다른 친구들이 갖고 싶은 걸 저도 갖고 싶다고 하면 항상 사주셨습니다. 그런 따뜻한 마음과 큰 사랑을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중국으로 떠나 사업을 하신다고만 들었지, 선교 활동을 하고 계셨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북한에 억류되신 이후,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인가.
“저는 아버지 억류 사실을 뒤늦게 불과 1년 반 전에 통일부를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제 개인정보를 통해 연락이 왔는데 처음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습니다. 확인 전화를 하고서야 사실임을 알았고, 충격이 너무 커서 일주일 정도 연차를 내고 집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건강과 안전은커녕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공포와 무력감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무기노동교화형을 받으셨다는 걸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고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겪고 계실지 상상하면서도 그 곁에 있어 드릴 수 없다는 현실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된 지금까지, 생사 확인이나 접촉은 있었나.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억류된 김정욱, 김국기 선교사님 모두 북한 당국으로부터 어떤 공식적인 생사 확인도 없는 상태입니다. 정부나 국제기구를 통해 계속 확인 요청을 하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정부나 국제사회, 교계의 대응을 평가한다면.
“지난 몇 년간 정부가 납북자 대책팀을 새로 만들고 유엔 인권이사회 회기 기간에 맞춰 제네바를 방문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건 정말 감사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WGEID), 임의구금 실무그룹(WGAD)이 공식적으로 저희 사례를 다뤄주었고 미국 국무부, 유럽의회 등도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교계에서도 평화한국 같은 단체가 해외와 국내에서 지속해서 기도와 캠페인을 이어주셨고, 유튜브나 SNS로도 많은 분이 기도해주시는 걸 보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독일 베를린 북한대사관 앞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시위를 이어가시는 게르다 여사님을 직접 뵙고 너무 감사하고 큰 힘이 됐습니다.”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족으로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관심이 줄어든다는 건 언론 보도가 줄어든 문제를 넘어, 존재 자체가 잊힐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세 분 선교사님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심은 곧 생명줄입니다. 오토 웜비어 사건은 많은 국민이 기억하지만, 저희 아버지와 두 선교사님의 이름은 아직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더 많은 분이 관심을 두신다면 그 마음이 북한에도 전해져 세 분께 희망의 메시지가 될 거라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셨던 북·중 접경 탈북민 지원 사역을 지금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처음엔 아버지가 선교 사역을 펼친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어릴 적에는 교회 다니시는 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신앙이 생기셨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가장 어려운 북한 주민과 탈북민들에게 쉼터를 마련하고 먹을 것과 의약품을 나누며 복음을 전하셨더라고요. 이제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길을 걸으셨기에, 제게는 위대한 아버지입니다.”

=마지막 말씀이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마지막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앞에 오셔서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으시고 신발과 가방을 사주셨던 기억입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됐습니다.”

=아버지 사역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2024년 10월 아버지 억류 10주기를 맞아 독일 베를린 북한대사관 앞 시위에 직접 참석했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이어온 게르다 여사님과 현지 기독교인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세 송이 물망초’ 배지를 달아드렸습니다. 유엔과 EU, 국제 인권단체를 만나 억류자 석방을 촉구하는 편지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대표로 목소리를 내시게 된 이유가 있나.
“사실 저희 납북 선교사님들 가족 중에서는 제가 나이가 가장 젊고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인터뷰나 공개활동을 할지 망설였지만, 김국기·김정욱 선교사님 가족분들도 연세가 많으시고 여러 사정이 있으셔서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표로라도 세 분의 억류 상황을 알리고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지께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아버지, 꼭 살아계셔서 돌아오셔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테니 어디 편찮지 마시고 꼭 건강히 버텨주세요. 다시 뵙고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국민, 한국교회, 정부에 바라는 점은.
“이 기다림은 결코 가족만의 몫이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께서는 세 분 선교사님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한국교회에는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세 분 선교사님이 걸어가신 길은 복음의 본질을 실천한 길이였습니다. 그 길이 외롭지 않도록 계속 기도하고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부에도 간곡히 요청합니다. ‘국민의 생명 보호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처럼, 억류 국민 구출은 대한민국이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남북관계가 복잡하더라도 생명과 인권은 그 무엇 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해 하루빨리 송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